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그러니까

자로 무언가를 재고 있는 사람


그것이 흙구덩이의 넓이이건

벽과 벽 사이의 거리이건


목재와 목재 사이라든가

훌쩍 자란 키라든가


묵묵히 자를 들고

눈을 가늘게 뜨고서는

화단을 짜면서 폭과 높이를 가늠한다든가


한 소년의 슬픔과 미래 사이라든가

잦음과 무작정의 폭이라든가


고심되는 거리 사이에 

감정을 놓고 싶다든가

한 얼굴을 옮겨다 놓고 싶다든가


세상의 모든 진실한 배치란

점으로부터 점까지의 평행이면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 직전

손 닿으면 금이 갈 것 같은 팽팽한 의도


그러니까 태초에 인간을 만들었을 때도

심장과 뇌의 거리라든가

손과 등짝의 위치까지를 배치하기 위해

얼마나 재고 또 재고 그랬을 것인가 말이다.


이병률 <바다는 잘 있습니다(2017)>


참 저는 믿음이 좋은 아이였습니다. 아니 의심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세상을 살아가기 너무 버거웠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소원해졌다해서, 제가 살기 나아졌다거나 살만하다거나 그런건 아닙니다. 늘상 집나간 탕자라고 믿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하루 하루가 아슬아슬합니다. 버티기 힘들고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도무지 당신의 사랑에 대해 의심만 듭니다. 분명 당신은 제 삶을, 제 인생을 재고 또 재고 그랬을 것입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보시기에 참 좋았으리라 믿습니다. 그런 제가 당신의 뜻을 가장 거르는 사람이 되었다니, 거스르려 애쓰는 녀석이 되었다는게 참으로 웃깁니다. 분명 당신은 제 심장과 뇌의 거리를, 손과 등짝의 위치까지 재고 재었겠지만, 당신이 재신것들은 저에게 목재와 화단과 벽과 벽사이를 재신것이라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요.

오늘도 취했나봅니다. 죄송합니다. 그저 집나간 녀석의 투정이라 여겨주세요. 늘 그렇듯. 언젠가는 당신이 제 심장과 뇌의 거리를 이렇게 멀리 두신 것이, 세상의 모든 진실한 배치를 깨닫고 무릎을 꿇겠지요. 문득 오늘 집으로 오던길에 지쳐서 창에 얼굴을 대었던 그사람의 자국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