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입속의 검은 잎』(1991))
사람은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공허감을 쫓아내기 위해서 물건을 채워 넣는다.
이러한 사람이 바로 수동적 인간이다. 수동적 인간은 자신이 보잘것 없는 존재라는
불안한 마음에 그 불안을 잊으려 소비하고, 소비인이 된다. (...)
자극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으로서의 능동, 혹은 겉보기엔 열정적이지만 외부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능동은 아무리 과장된 몸짓을 한다해도 근복적으로는 수동이다.
<인생과 사랑> 에리히 프롬
문득, 5월의 달력을 보며 이번 달은 글 한 줄 남기지 못했다. 치열하지 못한 현실로의 도피.
그 속에서 읽고 읽고, 사고 샀지만. 무언가 허무하다. 작은 일상의 한 조각이 어렵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주저하게 되는 순간들. 무엇이 나를 가로막는 것인지 모른채 그저 버텨온 시간들.
그러다 문득, 내가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한 진짜 이유를 고민해본다.
내가 정신나간 사람처럼 책을 사고, 읽을려고 애쓰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읽으려하고, 정돈하지 못한 헛소리라도 쓰려하는 이뉴는.
결국 내가 수동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공허한 내면을 채우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이런 나에게 그래도 무언가를 하지 않느냐, 열심히 살려 애쓰지 않느냐 위로하지만
거기에 스스로 동의하지 못하고 침묵하는 이유 역시 내가 수동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어리석게도 그토록' 읽어보려 애쓰고,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울 따름이다.
'쏘다니는 개처럼' '머뭇거리며' '탄식'만으로.
주어진 유일한 자산인 '청춘을 세워'두고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리니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그래서 오늘도 질투하며,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를 기약하며.
그때는 무엇으로 나를 채울런지 부끄럽고 두렵기만하다.
에리히 프롬과 기형도. 그리고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