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눈사람 자살사건> 최승호 (『눈사람 자살 사건』(2019))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 많은 일도 없었다. 그러나 너무도 힘들 때가 있다. 몸은 피곤하고, 정신은 지쳐 있음에도, 텅 빈 새벽. 잠들지 못한 채 물끄러미 나를 둘러본다. 이대로 모든 것을 멈추고 싶은 밤.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고, 아니면 내가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은 걸까.’ 알 수 없다. 이대로 사는 일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하루하루 투닥 거리며, 미워하고 미움 받고, 주고 받는 일이 삶이라면, 것도 나쁘지 않겠다. 나쁘지 않겠지만, 분명히 나에게는 나쁘다. 이렇게 잠 못 들고 있지 않은가.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찬물을 틀어도 죽고, 따뜻한 물을 틀어도 죽는다. 눈사람인 이상, 물을 틀지 않아도 점점 죽어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 다만, 수도꼭지를 틀 용기조차 없을 뿐. 결과는 같다. 오랫동안 벌벌 떨며 살았고, 앞으로도 녹아가는 손발을 보며 벌벌 떨겠지. 오늘도 수도꼭지만 바라본다. 녹아내리는 손이 이제는 저 수도꼭지를 쥘 수조차 없음을 알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