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는 비교적 조숙한 편이었다. 믿어질지 모르겠다. 10살 남짓했을 때다. 죽음은 내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다. 최대한 빠르게, 아프지 않게 죽는 것. 이유는 하나였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읽어봐도 세상을 산다는 건 죄를 짓는 일이었다. 삶 자체가 죄를 지어가는 일이라면, 종국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자연사 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 믿었다. 자살은 불가능했다. 자살 역시 죄였으니까. 자신을 죽이고, 부모님께 죄를 짓는 일이다. 그래서 기도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여 달라고.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갔다. 정작 자신의 죽음은 원했지만 겁이 많았다. 주변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떠나셨고, 아버지도 떠나셨다. 세상 역시 수많은 죽음으로 시끄러웠다. 그렇게 내 첫 번째 기도제목은 사그라 들었다. 더 이상 기도하지 않게 되었다.
의문이 맴돌았다.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왜 이 지리한 고통의 반복을 견뎌내야 하는가. 그 고통을 견뎌낸 끝이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답이 없는 질문만이 맴돌았다. 한 선배가 명쾌하게 해답을 주기 전까지. “애 새끼가, 한 대 처 맞아야 정신을 차릴래.” 일단 던져진 목숨이라면, 스스로 정하지 못할 거라면, 움직여야 했다. “왜?”라는 질문은 사치다. 여유가 있다는 소리다. 급한 사람은 “왜”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어떻게”가 중요하다.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고,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직장을 구하고. 일단 살아남아야하니까. 실재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았다. 당장 삶을 종료하기로 마음먹지 않는 이상은. 다시 시간은 지나갔다. 정신없이 일에 치여 살면서 어떻게에 익숙해졌다. 작지만 주어진 물질은 달콤했다.
그러다 문득, 첫 번째 기도제목과 왜가 다시 찾아왔다. <내가 왜 계속 살아야 합니까>는 그에 대한 해답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읽어야만 했다. 좀처럼 쉽게 읽히지 않는 말들이었지만, 의무감을 느꼈다. 읽히지 않는 이유는 확실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문명사학자가 쓴 책이니 지금과는 동떨어진 문체일 테다. 수 많은 고전이 내용도 내용이지만, 문체에 적응하기 힘들어 읽기 어렵듯이. 약 백년 전의 간극은 감안해야 하는 글이다. 책은 어느 날 윌 듀런트의 집에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시작한다. 그 남자는 살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 달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자살할 것이라고.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 남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저자는 고뇌한다. 왜 그랬을까. 저자는 일종의 집단지성(?)을 발휘할 생각에 이른다. “‘생각 하는’ 만큼 실제로 잘 ‘살아 온’ 당신(p.18)”들, 버트런트 러셀,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조지 버나드 쇼 등 다양한 분야의 유명인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많은 유명인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저마다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의외로 비관적인 사람도, 더없이 열정적인 사람도 각자의 이유에 따라 삶을 지속하고 있다. 다만 나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았다. 그저 수많은 말의 잔치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저자가 마지막 편지로 던져준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는 비결은 한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대가로 그의 삶을 한층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업의 발견(p.190~191)”하라는 조언조차 버겁게만 느껴진다. 말의 잔치 속에서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뿐(p.86)”이 노리에 박혔다. 불확실성을 견디기에는 너무 약한걸까. 조지 버나드 쇼의 말마따나(“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 (p.166)”) 그런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시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놈에게는 매가 제격이란 말일까.
다른 유명인의 말보다 의외로(?) “ 종신형 죄수 79206번”의 말이 와 닿았다. 그가 어떤 이유로 종신형 죄수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형벌의 무게로 짐작할 따름이다. 그럼에도 그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죗값을 치르는 상황에도 살아서 자유를 즐길 수 없는 상황에도 담담했다. “인생은 역행할 수 없”고 “인간도 마찬가지(p.160)”라고 고백하는 모습이 그 어떤 유명인의 이야기보다 인상 깊었다. 과거를 부정하지 않고, 현재를 받아들이며, 미래에 절망하지 않았다. “인생은 부단히 앞으로 움직이는 강과 같습니다. 소용돌이도 있고 역류도 있겠지만, 강줄기 자체는 계속 나아가는 것(p.160)”이라고 말하는데, 단단한 그의 내면을 느끼기 충분했다. 그가 감옥에서 생을 마쳤는지 모르겠다. 강줄기에서 어떤 역류를 만났는지 모르겠다. 다만, 그가 발견한 진리, “행복이란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p.158)”에서 바다에 도달하지 않았을까.
“이제는 인간의 변치 않는 위대함을 믿거나 삶에 죽음으로 지울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영적 고갈과 의존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마치 예수의 탄생을 갈망했던 그 시대처럼. (p.22)”
2019년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26.9명으로 2017년 이후 계속 증가추세다. OECD 회원국 중 1위다. OECD 회원국 평균 자살률보다 2배 이상 자살률이 높다. 자살률 1위의 국가가 출산율 최하위의 국가인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네 삶이 팍팍하다는 증거일 테다. 백 년 전쯤의 글이 다시금 소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듀런트는 백 년 전에도 “영적 고갈과 의존의 시대”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나쁜 상황인지도 모른다. 정신없이 “어떻게”에만 매몰되었던 우리가 그때보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나빠졌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자아보다 더 크고 수명보다 더 오래가는 목적(p.188)” 조차 찾을 수 없는 사회가 된 걸까. 백 년 전의 물음이 아직도 나와 우리에게는 유효하다. 10대의 기도제목과 20대의 왜를 돌아본다. 아직은 여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명쾌한 답을 주었던 형에게 한 대 처 맞기까지는. “인간은 이 세상을 뜰 때도 이 세상에 올 때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리어왕> 5막 2장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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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진리’의 발견이야말로 인간이 저지른 역사상 최대의 실수였다는 결론을 내리기(p.17) 직전에 와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고 보호하던 환상과 절제를 앗아갔을 뿐입니다. ‘진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름답지도 않으며 그토록 열렬히 갈구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제 와 그것을 바라보면 우리가 왜 그토록 성급하게 ‘진리’를 찾으려 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진리’는 순간적인 쾌락과 내일의 사소한 희망 외에는 존재의 이유를 앗아갔으니까요. / 우리를 지금의 이 길로 데려온 것은 과학과 철학입니다. 오랫동안 철학을 사랑해 온 나는 이제 삶 그 자체로 눈을 돌리려 합니다. ‘생각 하는’ 만큼 실제로 잘 ‘살아 온’ 당신에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청하려 합니다. p.18
이것이 현대의 본질적 상황이다. 우리를 비관주의에 빠뜨린 것은 단지 세계대전만이 아니며 최근의 경제 침체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일시적인 부의 감소나 심지어 수백만 명의 죽음보다도 더욱 근본적인 문제다. 비어 있는 것은 우리의 집이나 금고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다. 이제는 인간의 변치 않는 위대함을 믿거나 삶에 죽음으로 지울 수 없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영적 고갈과 의존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마치 예수의 탄생을 갈망했던 그 시대처럼. p.22
도구는 달라져도 목적은 다름이 없다. 규모가 더 커졌을 뿐, 인간(p.33)의 목표는 선사 시대나 고대에 그랬듯 여전히 이기적이고 유치하고 어리석고 모순적이고 살인적이며 자멸적이다. 모든 것이 진보했다. 인간만 제외하고. / 그리하여 모든 역사는, 인간이 축적하고 발견한 그 모든 것의 자랑스러운 기록은 종종 헛된 순환이자 맥 빠지는 비극처럼 보인다. ... 콩도르세가 말한 ‘인류의 완전을 향한 무한한 가능성’이 남긴 것은 이것이 전부다. 정말이지 가능성만은 무한했다. p.34
종교적인 것은 돈에 팔리거나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되면 항상 죽어 버리게 마련이다. p.41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냐 개인주의냐’ 하는 것도, ‘유럽이냐 미국이냐’ 하는 것도, 심지어 ‘동양이냐 서양이냐’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간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종교는 철학보다 심오하며, 지상에서 인간적 행복을 구하기를 거부했다. 종교는 인간의 희망을 지식이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곳인 무덤 속에 가져다 두었다. p.43
한 세대의 철학은 다음 세대의 문학이 된다. p.61
<찰스 비어드의 답장> 오래전에 아마도 시인 밀턴이 이렇게 말했지요. “진실은 처음엔 ‘끔찍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다시 말해 진실이란 우리 기존의 망상과 확신을 어지럽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진실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살멩 받아들이게 되지요. p.65
<앙드레 모루아의 답장>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뿐입니다. p.86
<윌 로저스의 답장> 인생이란 결국 한바탕의 야단법석이다. 그러니 웃을 일을 만들자.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하자. 아무것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지금 이 세대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은 확실히 아(p.92)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각 세대는 이전 세대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지 이전 세대 덕분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을 구하려’하지 말자. 간절히 구할수록 오히려 함정에 가까워질 뿐이니까. / 하나의 이상에 헌신하지 말자. 그건 마치 호수처럼 보이는 신기루를 향해 말을 달리는 일과 같다. 도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호수는 이미 없을 것이다. 사후 세계에 관해 뭔가를 믿는 건 괜찮지만 그곳이 이러이러할 거라고 너무 확고하게 믿지는 말자. 그러면 그곳에서의 삶도 그리 실망스럽게 시작되지 않을 테니까. 패배할 때마다 한 발짝 앞서갈 수 있는 그런 삶을 살도록 하자. p.93
<해블록 엘리스의 답장> 괴테가 그랬던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은 모두 질병이라고. p.106
<칼 래믈리의 답장> 나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현자가 되어 지나친 추상적 사고에 따라오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우울과 절망을 받아들이느니, 지금처럼 열심히 일한느 사업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p.110
<어니스트 홉킨스의 답장> 현대의 정신적 문명 세계 전체는 진실이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삶의 충만함에 접근하려면 진실의 길을 따라가야 하겠지만 그 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종교의 영속적 가치는 그것이 인간의 정신에 일으키는 열망과 희망입니다. p.112
표현될 수 없는 감정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짓된 것은 아닙니다. p.113
<에르네스트 딤닛의 답장> 내가 신을 믿게 했던 신앙은 이제 죽어 버렷지만 나는 죽는 날까지 신앙이 준 환희를 애도하리라. -Ch. M. 게랑 p.129
과학에 대한 당신의 확신이 비관주의를 낳은 것입니다. 불신을 허용할수록 희망의 여지는 늘어납니다. 믿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으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p.136
“우리는 우선 믿지 않고서는 이해하길 바랄 수 없다.” - 존 헨리 뉴먼 p.136
<오언 C. 미들턴(뉴욕 싱싱교도소 종신형 죄수 79206번)의 답장> 철학자에게 내가, 즉 종신형을 받고 감방 벽에 갇혀 있는 사람이 들려줄 수 있는 대답은 나에게 인생의 의미란 거대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나 자신의 능력, 교훈을 배워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그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한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한마디로 인생의 가치란 딱 그것을 쟁취하고 활용하려는 나의 의지 만큼인 것이지요. p.155
진리는 아름답지 않지만 딱히 추하지도 않습니다. 왜 둘 중 한쪽이어야 합니까? 통계의 숫자가 그저 숫자일 뿐이듯 진리도 그저 진리일 뿐입니다. 자기 사업의 정확한 상태를 알아(p.157)보고 싶은 사람은 통계를 확인합니다. 통계가 불량한 사업 상태를 드러낸다 해도 그는 통계를 욕하거나 자신의 환상을 깨뜨린 통계가 추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진리를 저주하겠습니까? 진리가 그의 인생에서 하는 역할은 사업에서 통계가 하는 역할과 다를 바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선천적인 우상 숭배 성향 때문에 진리의 조각상이 고귀한 의복을 둘렀을 거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막상 초라하고 벌거벗은 모습의 진리가 눈앞에 나타나면 ‘환상이 깨졌다’고 외치지요. / 관습과 전통 탓에 우리는 진리와 자신의 믿음을 혼동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관습과 전통, 현재의 생활 방식은 우리가 이런저런 물질적 안락을 누리는 이런저런 신체적 상태가 아닌 이상 행복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들었지요.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믿음일 뿐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행복이란 정신적으로 만족스러운 상태라는 점입니다. 그런 만족은 무인도에서도, 작은 마을에서도, 대도시의 다세대 주택에서도 찾을 수 있지요. 부자의 대저택에서도 빈자의 오두막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p.158
내게 인생은 부단히 앞으로 움직이는 강과 같습니다. 소용돌이도 있고 역류도 있겠지만, 강줄기 자체는 계속 나아가는 것이지요. p.160
인생은 역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p.160
<버나드 쇼의 답장> 젠장, 내가 어찌 알겠소? 그런 질문에 뭔 의미가 있단 말이오? p.166
어쩌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뿐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본능’이라는 것은 없으며 고독에 대한 공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p.169
“인간은 이 세상을 뜰 때도 이 세상에 올 때만큼 참고 인내해야 한다.” -<리어왕> 5막 2장 p.170
인간의 탐욕은 이런 원시 시대의 불확실성에서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악덕이 한때는 생존 투쟁에 꼭 필요한 미덕이었던 것이지요. 이는 우리의 시초에 대한 일종의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177
민주주의가 파멸하는 것은 ‘언제나 다수의 바보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p.181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면 자아보다 더 크고 수명보다 더 오래가는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p.188
한 존재는 그를 포함하는 더 큰 총체와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삶에 일관된 형이상학적, 보편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어도 특정한 삶의 의미를 그보다 큰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찾아낼 수는 있겠지요. p.188
나로서는 삶의 의미와 만족에 이르는 길을 이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체에 참여하십시오.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하십시오. 삶의 의미는 우리가 보다 더 큰 존재를 위해 생산하고 기여할 수 있도록 부여받은 기회 속에 있습니다. ... 삶의 의미와 만족을 찾는 비결은 한 사람의 모든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그 대가로 그의 삶을(p.190) 한층 충만하게 만들어 주는 과업의 발견입니다. p.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