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는 세상은 의도는 악하더라도 결과가 선함을 기대하는 시스템이다. 우리 사회의 큰 틀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시장원리의 기초를 밝힌다. ‘우리가 저녁상을 차릴 수 있는 것은’ ‘자비심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개개인의 이기심에 의해 움직인다. 정치는 어떠한가. 민주주의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선거.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을 때, 그 어떤 논리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결국 개개인의 이기심이 작용한다. 나의 자산을 불려주고, 내가 영업 활동에 유리한 대표자를 뽑고자 하는 건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연한 권리다.
시스템에 대한 기대와는 달리, 이기심이 항상 선한 결과를 낳지 않는다. 자원은 무한하지 않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이 유한성이 이기심과 합쳐질 때, 경제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는 커지고, 정치가 복잡해질수록 정무적 판단이 넘쳐난다. 덕분에 “어떤 사람은 시중을 들고 어떤 사람은 시중을 받”는다.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마찬(p.302)”가지다. 어쩌면 이러한 부조리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숙제다. 이기심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었지만 부조리 역시 주었다. 이기심은 우리를 부유하고 살기 좋게 만들어 주었지만, 구원할 수는 없었다.
한스 라트의 <그리고 신은 내게 도와달라고 말했다>는 3부작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이야기는 4년 전 세상을 떠났던 신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주인공 앞에 선다. 새로운 메시아가 되어 세상을 구원해 달라는 황당한 제안을 가지고서. 늘 그렇듯 한스 라트의 작품은 재치 있고 재미있다. 불완전한 야콥이 더 불완전한 사람들과 함께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전지전능한 신도하지 못한 일인데? 수많은 물음표를 따라가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어쩌면 메시아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은지 모른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나 자신이 통합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나 역시 나에게는 또 다른 타인이다. 한 개인 역시 다양한 역할과 존재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의 아들이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을 때, 스스로를 구원하라는 조롱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더 큰 뜻을 위해 자신을 대속 제물로 바쳤다. 하물며 우리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겠는가.
소설에서 신은 십계명이 고루해졌다고 말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계명을 내려준다. 그 계명은 결국 사람 인(人)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지만, 서로를 구원해 줄 수 있다. 그 과정이 두렵고 힘들겠지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기심과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 악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선한 결과만을 기대해야하는 취약한 시스템 속에서 무관심에 침묵한다고 해도, 세상을 냉소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 관심을 가지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행동하게 된다. 행동하는 양심. 소설의 신이 말하는 유일한 계명의 의미,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야콥이 말했듯 “세상의 문제들은 침묵한다고 없어지지 않( p.347)”는다.
스스로에게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분절된 다양한 존재들을 무시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힘들지만 조금씩 끌어안고 관심을 가져줘야 한다.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정신적 증상들이 나타나는 것일 테다. 소설 속 신이 내려준 새로운 일계명.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는 핵심이 아닐까. 3부작의 마지막은 말한다. “무관심하지 말라.(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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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양심의 가책을 덜려고 그러는 것일 수도 있어. 하지만 기부 시스템은 다 그런 식으로 돌아가. 자기가 가진 것의 대부분을 양심의 가책 없이 계속 소유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의 지극히 작은 부분을 내주는 거지.” “그 말은 이웃 사랑이라는 것도 결국 위선이라는 건가?” “그게 뭐 어때서?” 권터가 답한다. “축제의 고기를 더 맛있게 즐기려고 자기가 가진 것을 남들에게 조금 나눠 주는 게 뭐가 잘못됐어?” p.211
“당신들 인간은 원래 그래. 주위를 둘러봐. 여기서도 어떤 사람은 시중을 들고 어떤 사람은 시중을 받아.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마찬가지야. 인간들은 제도를 바꾸기보다는 소외받는 이들이 약간 대우받는 느낌이 들도록 그저 월급과 사회 복지 같은 걸 발명했을 뿐이야. 이게 위선이 아니고 뭐겠어? 당연히 위선이지. 왜냐고? 진정한 정의가 없어서 그래. 도덕과 이타심은 거짓말과 어중간한 진실을 버무려서 만든 것에 불과해. 당신들 인간을 가장 인간(p.302)답게 만드는 것은 존경할 만한 동기들이 아니라 비열함과 음험함이야. 인간들은 겉으론 고상한 척하지만 속은 악질이지. 하지만 그게 불만이라는 뜻은 아냐. 나는 당신들의 그런 면이 너무 좋으니까.” p.303
“아니, 농담이야. 하지만 내가 십계명을 개정했다는 건 농담이 아냐. 십계명을 선포할 용의가 있어?” “오, 뭐 받아쓸 거라도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기습적으로 되묻는다. 아벨은 고개를 젓는다. “그럴 필요 없어. 사람들은 어차피 길면 기억을 못하니까. 그래서 내가 최고로 간략하게 줄였어.” “그 말은 이제 십계명이 아니라 그보다 적다는 거야?” 아벨은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놀라지나 마.” “다섯 계명으로 줄였군.” 내가 넘겨짚는다. 그가 자랑스럽게 웃는다. “그 정도를 갖고 내가 놀라지 말라고 했겠어? 이젠 단 하나의 계명밖에 없어.” “뭐? 계명이 하나뿐이라고? 우와, 정말 궁금해지는 걸. 그게 뭔데?” “무관심하지 말라.” 아벨이 대답한다. p.322
“사람들에게 무관심하지 말고, 동물들에게 무관심하지 말고, 식물과 이 지구에 무관심하지 말고, 굶주림과 고통에 무관심하지 말고, 전쟁과 불의에 무관심하지 말고, 환경 파괴를 비롯해 인류 스스로를 망치는 모든 것에 무관심하지 말라는 거지. 이 복음의 의미는 내가 어린양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결코 영웅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거야.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인간들이 마치 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들과 조금도 관련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을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이지.” p.323
“세상의 문제들은 침묵한다고 없어지지 않아.” p.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