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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는 기술

[도서] 사람을 읽는 기술

이태혁 저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저자 '이태혁'은 프로 겜블러다. 그런 그가 게임의 기술을 말하는게 아니라 사람을 읽는 기술을 말한다. 게임의 승패는 사람을 속이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기술에 있다고 말한다.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구경꾼들의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어떤 패를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저자를 생각하자면 타짜... 같은 속임수가 노련한 노름꾼이 아니라 오히려 심리학자, 정신학자, 통계학자, 분석자 등등의 느낌과 더 연결된다. 눈빛, 코의 움직임, 손짓, 그리고 눈동자를 움직이는 등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모든 행동과 몸짓을 통해 사람의 심리상태를 찾아내는 그의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일반화된 방법이라 말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큰 오차를 감안하고 생각해 봤을 땐 무리가 없을 정도의 통계치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게임판에서 얻게 된 사람을 읽는 기술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이런 통계치나 분석치는 예외가 너무 많다. 사람... 이라 더 그렇다. 사람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다. 잘 아는 사람이라 할 지라도 뜬금없이 나타나는 이상 행동들은 나의 예상치를 너무 많이 벗어나기 때문에 가끔은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니 일반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행동을 내보이는 일명 사이코패스 및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왜 달라도 너무 다른 생각과 행동들을 보일까. 그렇다면 과연 사람은 모두 다 일반화된 성향을 보이는게 과연 맞는걸까.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아무 사건 사고 없이 잘... 사는게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것인가? 사람 각각 다양성을 존중해 주고 개체성과 자유가 주어질 때 사람은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하는데, 여기저기 각각의 개별성을 제한하며 일반화된 사람들이 모여사는 그 곳은 과연 살기좋은 곳일까?


사람을 읽는 기술은 어쩌면 일반회된 사람들의 성향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일반화된 사람들을 각각의 특이한 성향이나 이런저런 행동을 통해 분석해내는 것도 대단하다. 그만큼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너무나 많은 다양성 때문에 어쩌면 평생이라는 시간도 모자랄 수 있겠다. 그렇게 자신의 경험치를 더해 자신만의 분석 데이터를 만들어낸 저자의 끈질긴 의지와 열정이 대단하다. 사람을 대할 때 참고하면 좋을 여러가지 기술들이 많다. 


실제로 생리적 흥분이 증가하면 주의력과 정보처리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다는 의학적 연구 결과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터널 시야 Tunnel Vision'라 칭한다. 터널에 들어가면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는 것처럼 화가 치미는 등의 이유로 흥분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무모한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수는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는 신랑이 생각났다. 우리 신랑은 늘 이렇게 욱 하는 성질 때문에 사고를 치고 욱하는 성질 때문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나에게 늘 진다. 난 이겨서 좋지만 욱할 때 나타나는 성향들은 가끔 내 남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아 남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언젠가 신문에서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가 사회에 발을 딛는 학생들에게 "삶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Life is not fair : get used to it."고 조언했다는 기사를 봤다.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백번 옳은 말이다. 외모, 집안, 재능, 국적, 시대 등등.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 선다. 황금 수저를 입에 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손가락 하나 물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부모덕에 페라리를 몰고 쌩쌩 내질러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채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이도 있다. 인간이 평등을 누릴 기회는 오직 죽음 앞에서다. '죽음의 질'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 명제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찍게 되지만 말이다. 인정하자. 인생은 불공정한 게임이다. 이는 포커 게임이 불공정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빌게이츠의 말에 적극 동감한다. '돈'이라는 물질이 계급을 만들고 차등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돈'이라는 건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필수불가결한 수단이기에 사람이 개발한 것이 아닌가. 어쩌면 사람의 불행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환경에서 이겨내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불공평한게 싫다면 공평해지기 위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을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인간 스스로 발전하는게 아닐까. 지금의 나를 인정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의 나를 인정하지 못한다면 계속 그 곳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 불평, 불만만 가득 안고 말이다. 빼앗아서 도둑이 되어 감옥에서 살 것이 아니라면 노력하자. 공평해지기 위해. 


어떤 사람이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많이 배웠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배움과 지식이 많다고 해서 범죄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의 양과, 죄를 범할 가능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어떤 사람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많을수록 객관성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객관성이란 지식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이 배웠다는 것은 그만큼(배우는 데 시간을 써야 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다는 것 의미한다. 그래서 학문적 논리에서 앞서 갈지 모르나 대인 관계에서는 (경험이 부족한 관계로) 뒤처질 가능성이 더 높다.

똑똑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을 통해 제도를 만들고 미래를 계획하고 준비하면 된다. 그렇다고 그들을 특별하게 대우하면 안된다.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다. 각자 살아가는 역할이 다를 뿐이다. 지식자들에게 특혜를 주는 건 불공평하다. 그리고 그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라든가 '그들은 나쁜 사람이 아닐 것이다' 라는 등의 선입견이 불공평을 만들어낸다. 불공평이 심해지면 자연스럽게 공평해지고자 한다. 그렇게 전쟁이 나고 그렇게 싸움이 나고 그렇게 범죄는 발생한다. 모두다 무능하면 그것만큼 불편한 세상이 어디 있을까. 모두다 능력이 출중하다면 서로 자신의 권리와 가치를 높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얼마나 많이 싸우게 될까. 얼마나 힘들까. 그렇기 때문에 일부 몇몇만이 능력을 인정받고 세상에 혁신을 일으키고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그들 스스로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과 다르다라는 생각은 자만이고 교만이다. 


그들도 이렇게 단점이 너무도 많은 그냥 '사람'이기 때문이다. 

랑반데룽이란 쉽게 말해 산이나 숲이나 사막 등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자신은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빙빙 도는 현상인 것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랑반데룽에 빠질 확률도 더 높아진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학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더 객관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학자는 자신이 가진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주관적일 가능성이 높다.


◆ 링반데룽(ringwanderung) :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일을 말한다.

자신이 만든 기술이나 지식의 틀에 갖혀 더 나아가지도 더 포기하지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가. 자신만의 기준을 세워 고집을 피우고 더 나아가 아집에,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강해지는 순간 독재가 시작되며 자신만 옳다는 자신만 최고라는 무서운 사상속에 갖히게 된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속에 갖혀 '혼자' 살아가게 된다. '혼자' 사는게 과연 행복할까? 


사람을 읽는 기술을 통해 사람에 대해 많이 배웠다.. 그래도 사람은 스스로도 다 알 수 없는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많이 알 수 있을까. 그냥 그렇게 서로를 알아가며 이해하며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게 인생 아닐까.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이런 '사람을 읽는 기술'은 필요하지 않을까? ㅋㅋㅋ



[발췌]======================================

실제로 생리적 흥분이 증가하면 주의력과 정보처리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된다는 의학적 연구 결과가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터널 시야 Tunnel Vision'라 칭한다. 터널에 들어가면 시야가 급격히 좁아지는 것처럼 화가 치미는 등의 이유로 흥분이 고조된 상태에서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무모한 결정을 내리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리수는 화를 자초하기 마련이다.


승부욕은 자동차 엔진 같다는 것이다. 엔진이 달궈져야 차가 달릴 수 있지만 엔진이 과열되면 차가 멈춰버리는 것처럼, 건전한 경쟁심은 더 큰 성취를 이루도록 북돋는 에너지가 되지만 도가 지나치면 자신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도 있다. 냉철한 분석을 토대로 전진과 후퇴할 때를 알고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다.


자고로 독야청청 소나무가 먼저 베인다. 굵고 곧은 나무일수록 목재나 땔감을 찾는 나무꾼들의 눈에 쉽게 띄기 때문이다. 인간사도 마찬가지다.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속도와 수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등 뒤를 살펴야 한다. 추락할 때 낙법으로 몸을 보호하듯, 욱일승천할 떄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부드러운 도약법이 필요하다.

언젠가 신문에서 세계 최고의 갑부인 빌 게이츠가 사회에 발을 딛는 학생들에게 "삶이 불공평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라. Life is not fair : get used to it."고 조언했다는 기사를 봤다. 기분은 썩 좋지 않지만 백번 옳은 말이다. 외모, 집안, 재능, 국적, 시대 등등.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서로 다른 출발점에 선다. 황금 수저를 입에 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맨손가락 하나 물고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부모덕에 페라리를 몰고 쌩쌩 내질러 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뙤약볕 아래 무거운 짐을 이고 진 채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이도 있다. 인간이 평등을 누릴 기회는 오직 죽음 앞에서다. '죽음의 질'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이 명제에 대해서도 물음표를 찍게 되지만 말이다. 인정하자. 인생은 불공정한 게임이다. 이는 포커 게임이 불공정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항상 깨어 예비하라. 뜻밖의 기회는 단단히 붙잡고 불시의 위험은 날쌔게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왼쪽 귀는 좌뇌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논리를 따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왼쪽 귀에 전화기를 갖다 대는 것이다. 상대방과는 감정 공유가 없는 사이일 확률이 높다. 반대로 오른쪽 귀로 전화기를 옮긴다면 대화 주제가 감정적인 영역으로 옮겨갔다고 짐작할 수 있다. 오른쪽 귀는 감정을 관장하는 우뇌와 가깝기 때문이다. 더불어 상대방은 애인이나 친구, 적어도 계산적인 이해관계의 사람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한 사람의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은 현재를 보면 그 사람의 과거를 유추할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이를 '심리의 작용 반작용 법칙'이라 정의하곤 한다. 한 사람의 과거는 사라지지 않는 잠재의식이다. 상황에 따라 그것은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콤플렉스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어느 쪽이든 과거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암호가 될 수도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에어즈 예일대 법대 교수는 저서 <슈퍼크런처 :  불확실한 미래를 데이터로 꿰뚫는 힘>이라는 책에서 "우리는 즉흥적 판단이 시들해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단언한다. 인터넷과 데이터, 통계의 힘이 직관을 대체하고 있다는 그의 통찰은 '감보다 확률을 믿으라.'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어떤 사람이 흉악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과 그 사람이 많이 배웠다는 사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즉 배움과 지식이 많다고 해서 범죄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지식의 양과, 죄를 범할 가능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어떤 사람이 '객관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이 얼마나 많은가'와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많을수록 객관성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 객관성이란 지식에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경험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이 배웠다는 것은 그만큼(배우는 데 시간을 써야 하기 때문에) 경험이 적다는 것 의미한다. 그래서 학문적 논리에서 앞서 갈지 모르나 대인 관계에서는 (경험이 부족한 관계로) 뒤처질 가능성이 더 높다.


랑반데룽이란 쉽게 말해 산이나 숲이나 사막 등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자신은 똑바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같은 자리를 계속해서 빙빙 도는 현상인 것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기 안의 랑반데룽에 빠질 확률도 더 높아진다는 사실은 더욱 흥미롭다.

학자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일지는 몰라도 더 객관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학자는 자신이 가진 지식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주관적일 가능성이 높다.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고자라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성무선악설을 주장하는데, 성무선악설이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선함과 악함은 사회 환경과 교육으로 조성된다는 것이다. 즉 인성은 후천적 요인에 따라 착해질 수도 악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고자는 이러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마치 연못에 고여 있는 물과 같다. 그러다 연못의 한쪽에 있던 둑을 트면 그제야 물이 흐른다. 이처럼 사람의 본성도 선과 악 어느 쪽도 아닌 자연 상태이고,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로 나타난다.

맹자같이 높은 학식을 가진 사람도 이렇게 랑반데룽에 빠지는 이유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학설, 명예, 권위, 사회적 지위 등을 포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현실의 랑반데룽보다 생각의 랑반데룽이 더 위험한 것은 자기 자신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가 더 힘들기 때문이다. 

생각의 랑반데룽은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깨닫기가 힘들다. 게다가 사람들은 짧게는 10~20년, 길게는 30~40년 동안 쌓아온 자신만의 생각을 깨트리는 것에 대해 무척이나 두려움을 느낀다.


반대로 경험이 풍부하고 다양한 입장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면  조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은 달콤한 말에 쉽게 넘어가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의 의견에 쉽게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경계한다. 그런 사람이 당신의 협상 파트너라면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보다는 객관적인 증거로 그를 설득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랑반데룽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해와 달에 몸을 맡겨 길을 찾듯, 자연의 섭리에 의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경험과 그것에서 나오는 지혜 그리고 강한 생존 의지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해야 랑반데룽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한 사실은 자신이 랑반데룽에 빠졌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탈출구가 보이지 않더라도 탈출구를 만들어낼 테니 말이다.


지혜는 인생이라는 험로를 안전하고 현명하게 헤쳐 나가도록 돕는 든든한 보호막이지만 거저 주어지는 법은 없다. 다양한 경험과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나이테를 늘리듯 한 겹 한 겹 그 두께를 늘려가야 하는 것이다. 경험의 수를 늘릴수록 지혜의 폭과 깊이를 넓고 깊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명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경심을, 잘난 척하는 사람은 경멸을 불러일으킨다." - 톨스토이


사람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의 배후엔 대부분 욕심이 자리하고 있으며 누구나 욕심은 있는 법이다.

거짓말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그것들을 전부 없애버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세상의 지위재'에 현혹되지 말고 '당신만이 지닌 지위재의 가치'를 높이라. 사악한 거짓말쟁이들이 침묵하리라.


당연하게 작동돼야 할 의심을 가로막는 것은 대부분 허황된 욕심이다. 의심은 '역시나'라며 고개를 젓지만 욕심은 '혹시나'라고 부추긴다. 의심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지만, 욕심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고 속삭인다. 욕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수록 의심은 희미해지고 결국 'OFF'상태가 된다.

'일단 한번 의심해보라'는 말이 다소 각박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거짓과 허위가 난무하고 조그만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고 남에게 속는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려면 의심하는 자세가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의심이란 불신과는 다르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의심이란 '믿지 않음'이 아니라 '과연 내가 보고 듣는 것이 진실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작업이다. 사람을 평가하든 사업 전망을 가늠하든, 무언가를 판단할 때 언제나 의심이라는 거름망을 먼저 사용하는 훈련이 쌓이다보면, '진실'을 간파하는 안목이 점점 높아진다. '일단 한번 의심해보라.'는 충고는 분명 당신의 리스크를 줄여 줄 것이다.


사람 마음속의 구분선을 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뺏기지 않으려 애쓰는 상대의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옛 우화에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긴 것은 찬바람이 아닌 따뜻한 햇볕이었던 것처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내놓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점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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