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뉴욕.
작가 지망생 조안나는 뉴욕에 왔다가 정착하게 된다. 친구가 남자친구와 동거하는 집에 얹혀살던 그녀는 뉴욕에서 살기 위해서는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출판업계의 문을 두드린다. 그렇게 소개받은 곳이 작가 에이전시였다.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작가 에이전시라고는 하지만 조안나는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렇지만 일을 해야 했기에 면접을 보게 됐는데, 다행히 조안나는 회사의 사장인 마거렛의 비서 겸 조수로 채용되었다.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디뎌 일을 시작한 조안나는 의욕이 충만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떨어진 일감은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명성을 알린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일명 제리의 앞으로 온 팬레터를 읽고 답장을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 답장 내용은 제리는 편지를 받지 않는다며, 작가에게 보내주는 관심과 사랑에 감사하다는 고정 멘트가 담긴 서식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안나는 제리에게 보낸 팬들의 팬레터를 하나씩 읽으면서 그들에게 답장을 따로따로 써주고 싶은 마음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보통의 성인보다 책을 많이 읽는 편이기는 하나 편식이 좀 심하고 어려울 것 같은 책, 혹은 유명한 책들은 미루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읽겠다고 메모해둔 책 목록에는 어디 어디에서 뽑은 꼭 읽어야 할 책 순위에 오르거나 하버드생이나 서울대생이 읽은 책 베스트 같은, 일명 세계문학전집이 유난히 많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되는 민음사나 문학동네 세계문학 같은 시리즈 말이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도 그래서 여태껏 읽지 않았다. 유명하면 손이 안 가는 습관을 좀 떨쳐내야 하는데 아직까지 그러질 못해서 책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책을 읽지는 않았어도 작가가 이 책으로 너무나 유명해져서 은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민음사에서 출판된 세계문학전집 책등에는 꼭 작가의 얼굴이 들어가는데 이 책만은 예외로 표지에 아무런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줄거리만 대충 알고 있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을 중심으로 작가 지망생 조안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직은 사회인이 아닌 조안나는 글을 쓰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뉴욕은 조안나와 같은 작가 지망생에게 꿈의 도시였던 건지 놀러 왔을 뿐인데 눌러앉게 됐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많은 이곳에서라면 꿈이 이루어질 거라 여기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진짜 현실은 꿈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래서 현실과 타협해 작가 에이전시에서 일을 하면서 금세 적응을 하게 되지만, 이 일이 맞는 건지,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조안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사회 초년생의 전형이었다. 의욕은 있으나 상사는 그녀에게 보람을 느낄만한 일을 주지 않았고, 정작 맡은 일은 너무 쉬운데 심적으로는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만 해야 했던 햇병아리 신입 직원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렇게 사회에 막 적응하기 시작하던 중, 개인적으로도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다. 사귀던 남자친구 칼과 제대로 끝내지 않고 그저 연락을 하지 않는 걸로 헤어졌다고 여겼다. 그 사이 서점을 운영하는 돈과 연인이 되었고, 얹혀살던 집에서 나가 살 곳을 구하던 조안나는 그와 동거를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조안나는 돈이 동경하는 대상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빠져든 게 아닌가 싶었다. 서점 주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글 쓰는 일도 틈틈이 해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조안나도 그처럼 작가 에이전시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 막 회사에 적응하기 시작한 그녀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사이의 괴리에서 그녀의 마음을 환기시켜준 건 제리에게 온 팬레터 덕분이었다.
제리는 과작을 하는 작가지만 너무나 유명한 소설로 인해 팬레터가 하루에도 몇십 통씩 도착했다. 그 편지들을 모두 읽어야만 했던 이유는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 때문이었다. 그는 존 레논을 살해한 뒤 경찰이 올 때까지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있었다고 했고, 이전에는 제리에게 팬레터도 보냈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모든 팬레터를 파쇄했기 때문에 무슨 내용이 담겨있었는지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사건이 재발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팬레터를 읽고 답장을 보내긴 하지만, 받을 수 없다는 형식적인 답변뿐이었다.
<호밀밭의 파수꾼> 속 주인공에 감정을 이입해 편지를 보내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또 읽던 조안나는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현존하는 작가의 책은 읽지 않았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이 말하는 감정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없기도 했지만, 같은 사람이 몇 번이나 보낸 편지를 읽고 나중엔 제리의 책도 읽고 난 후에는 그들에게 공감을 하며 마음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보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소리 역시 듣게 된다.
편지에 쓴 내용을 읽는 것, 전화를 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건 마음에 담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과 같았다. 조안나는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형식적인 편지 대신 진심이 담긴 답변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신 보낸 한 번의 답장으로 인해 곤란해지기도 했고 상대방에게는 원하지 않았던 일까지 일어나게 되기도 했지만, 그 일 덕분에 조안나는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자신의 마음에서 나온 목소리를 들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마음을 나누는 일에 대해서도 뚜렷한 생각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의 끝맺음을 할 수 있었던 건 그만큼 그녀가 성장했다는 뜻이기도 했고, 자신의 마음만큼이나 상대의 마음 역시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이 자신과 같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에 아무리 기분이 상했더라도 말이다.
조안나 래코프가 사회 초년생으로 경험한 회고록을 담은 <마이 샐린저 이어(My Salinger Year)>를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실제 경험담을 담은 이야기라 그런지 그녀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과 자신의 마음에 다가서는 과정이 와닿았던 영화였다. 방황하고 마음이 혼란스러운 사람들 개개인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들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 조안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영화 후반에 끝맺음을 확실히 했던 그녀의 모습이 참 유쾌했다.
초반엔 약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관계 설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장인 마거렛과 신입 비서 조안나의 모습 때문이었다. 마거렛에게는 냉소적인 면도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고, 중반 이후에 일어난 사건도 조금은 비슷한 상황 때문이라 느껴져서 그랬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향해 가는 과정이 비슷하기도 했지만, 이 영화는 타인에게 공감하며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 했다는 점에서 감성적인 영향을 받은 성장 영화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