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학생이던 A는 어머니께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한 바를 말씀드렸다. 철학이나 사회학 쪽으로 관심이 많으니 문과 계열로 진학하고 싶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팍팍한 살림살이에 지쳐 있던 A의 어머니는 ‘굶어 죽기 딱 좋은 전공’이라는 말로 A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 해서 A는 ‘취업에 그나마 용이한’ 이공계로 진학했다. B는 A와 같은 전공 동기로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 더 알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로 일본어 과목들을 수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B는 이내 좌절한다. 일본에 살다온 학생들이 대부분 수강하다 보니, ‘알고 싶다’라는 순진한(?) 열정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꽤 오래 전의 내 얘기다.
‘진격의 대학교(오찬호 글, 문학동네 펴냄)’는 이 땅의 대학을 졸업했고 대학에서 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장 친근하고 익숙할 것 같은 작가의 절절한 리포트다. 이 땅의 대학들이 교육 기관으로서의 지켜야 할 명예와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내동댕이치고 외면해 왔는지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사색’이다. 사색의 실종은 두 가지 측면에서 구조적이다. 하나는, 사색을 근본으로 하는 학문이 ‘취업에 필요 없다’는 이유로 사라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취업에 필요한’ 강좌가 우선적으로 개설되어 강좌의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하나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정답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토대가 마련되면, 배우는 사람은 스스로 사색에 잠길 수밖에 없다. (본문 p.52)
대학의 영어 열풍은 학생들의 일상의 사고를 완벽히 통제한다.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방해를 받는 것은 물론, 영어 공부가 사고력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다보니 획일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를 학생들이 어색해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중략⋯⋯ “정답 너머의 다른 생각을 해보라”는 말은 문장부터 어색하다. 그렇게 ‘경직’되어도, 영어만 잘하면 굉장히 ‘유연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본문 p.130)
돈이 없다면 값싼 밥을 먹으면 되는 것이고 학과 해외연수에 참여할 돈이 없다면 참여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쿨한 가치관이 스며들었다. 생계와 생존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어느 때보다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지만, 그 고통에 공감하는 감수성은 메말라갔다. 자본이 만들어낸 새로운 위계와 구획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차별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했다. (본문 p.170~171)
강산이 수회 변했을 시간이 지났건만, 내가 대학에 다니며 가졌던 회의와 좌절감의 원천이 현재 개선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하게 자리 잡은 것 같아 답답하다. 끝을 알 수 없는 경기 침체로 직업을 가진 이들도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리는 마당에, 구직을 위해 스펙을 쌓다보니 교양이나 사색은 놓아버릴 수밖에 없는 예비사회인인 대학생들의 고통도 외면할 수 없어 안타깝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이 상황이 암울하다. 그러나 작가의 말마따나 어쩔 수 없다고 이마저 놓아버릴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른 뒤, ‘죽은’ 시민으로 가득 찬 사회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비록 악조건이긴 하지만 체념하지 말고 끝까지 붙들어, 포기하지 않는 것이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