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저는 떠날 겁니다, 아주 멀리요.
그러니… 나를 죽이러 오세요.
서늘한 로맨틱 환상문학, 최세은 장편소설 『세벽』
부모님을 여의고 큰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 여덟 살 소녀이자 하인 '히', 저택 주인의 유일한 핏줄이고 차기 주인이 될 여섯 살 소년이자 도련님인 '에녹'을 중심으로 총 3부로 나뉘어 이야기가 흐르는 『세벽』
어린 나이에 아침부터 늦은 시간까지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히였지만 덜 외롭게, 덜 쓸쓸하게 항상 따뜻하게 대해주는 로자 아줌마가 곁에 있다.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히와 도련님은 서로를 신기해하고 히는 도련님을 보필하며 말동무가 되어 준다. 히는 도련님을 통해 '서재'와 '책'을 접하게 되고 글도 깨우치게 된다. 글을 읽고 쓰는 기쁨을 알게 된 히는 도련님을 동경하게 되고 도련님의 존재가 히의 마음에 크게 담아둔다.
도련님은 여전히 나의 우상이었다.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그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사랑스러움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p.31)
어느 날, 도련님은 약혼녀 그리고 몇몇의 하인을 대동하고 산책을 가게 되었다. 밤늦은 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는 도련님 일행을 마냥 기다리고 있던 히는 약혼녀와 대동했던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마주하고는 충격에 빠진다. 어째서 왜 죽어서 돌아왔는지 증오와 배신감을 감출 수 없었던 그날 밤. 우연히 약혼녀의 비밀을 알게되는 히. 그리고 열일곱이 되던 해에 히는 자신의 세상이라 생각했던 저택에서 나가기로 결심한다.
나는 세상의 벽을 뚫고 나왔다. 그리고 길을 잃었다. (p.63)
이렇게 1부가 끝이난다. 히가 하인으로 열일곱 살 때까지 이야기를 담았고, 2부와 3부에서는 국가의 경계가 사라지고 조직 생활을 하는 미래의 어느 시점의 배경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러니까 전혀 다른 세상에 나온 히와 션. (2부에서부터는 도련님의 이름이 션으로 바뀌어 활동함) .. 마음 한 편에 항상 남아 있는 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션은 히를 만나게 되는데......
나는 고아에다 하인이고, 여자이며, 장작을 팰 수 있다는 것 따위를 빼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인간이었다. 이대로 사는 것이 맞는가? 그게 정말 맞는가? 아름다운 도련님.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련님과 같은 선상에 설 수 없으리라.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나는 장난감, 그 이상은 되지 못하리라. 나는 누군가의 부속품으로만 가능할 것이고 그러다 죽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온전한 나로 살아갈 나날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p.51)
히는 도련님 덕분에 책을 접하고 글을 읽게되면서 생각의 폭도 다른 하인들에 비해 넓었던 인물이다. 때문에 로자 아줌마의 죽음이 인생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던 히가 자신의 세상이었던 저택과 도련님을 버리고 나가기로 결심한데에 가장 결정적인 이유이지 않았을까..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한 히의 선택에 응원과 동시에 어떤 일들이 펼쳐지지 기대가 되는데...
(궁금한 이후의 이야기는 책을 통해서!!!! ㅋ)
■ 책 속 또다른 문장 pICK
책에서 본 모든 것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일까. 나는 저택의 크기만큼 그늘진 부지를 바라보았다. 불이 타오르고 사그라졌다가 다시 일어나면 새로운 생이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 주인님과 도련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생은 거짓이었다. 이곳에도 불이 필요했다. 불을 지피고 나서 나는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p.51)
"… 너의 안부를 걱정했어."
그날, 마차를 쳐다보던 재희의 가라앉은 눈빛을 기억한다. 션을 뿌리치고 가는 히는 거침없었다. 막아서던 션의 손아귀가 얼얼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로자의 시신을 보고 무너지는 순간, 그녀의 몸은 발길질 한 번에도 쉽게 부서지는 눈사람 같았다. 그대로 사라져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션의 내부에서 뭔가가 툭 떨어졌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p.186)
1부에서 하인과 도련님이 등장하니까 아무래도 신분이 있는 그런 시대인가 싶어서 저택의 분위기라던가 그 시대의 복식을 상상하며 읽었는데... 응? 아니야? 으응? (혼돈) 그리고 1부 엔딩의 마지막 문장은 그냥 이 책이 담긴 한 줄이 아닌가 싶다.
2부와 3부는 전환되는 배경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어린 아이들도 있다.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던 등장과 이야기의 전개는 절정에 오른다. 솔직히 1부에서 2부로 전환되는 배경이, 그 세계관이 아주 조금 의아한가 싶다가도 곳곳에 있는 이야기의 설정이 이렇게 전개될 수도 있구나 감탄을 하며 읽었다. 솔직하게 1부에 비해 스토리의 임펙트가 다소 아쉬운 2, 3부였지만.. 그래도 만족! ( 1부의 재미가 좀 강했어...)
도련님과 하인의 서로에 대한 관심, 사이비 단체 조직, 아이들의 성장.. 등등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이 참 재밌었다. 나와 타인, 어른과 아이 그리고 나와 세상. 허물고 나온 세상의 벽 뒤엔 선과 악, 살면서 이어지는 관계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메세지가 담겨 있는 소설이었다. 히와 션을 통해 마치, 넘어지더라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오더라도 해 낼 수 있을거라는.. 나를 찾아 세상의 벽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살포시 건네는 것 같았던 『세벽』 .. 에필로그까지 정말 좋았던 소설!!! :D
(맞다.. 히의 세상과 션의 세상의 일치하는 순간.. 넘 설렜잖아.... ㅎ 내적함성.....)
최세은 작가님의 첫 작품 『세벽』 . 아. 너무 몰입하면서 재밌게 읽었다. 제목도 좋았고, 장르도 넘 좋았다. (나 환상문학 좋아하네)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너무너무 기다려진다. (어서어서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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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으나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으로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