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ead 의 가브리엘과 A Painful Case 의 더피를 보면 둘은 비슷한 성격과 가치관을 지닌 유사한 인물이다. 둘 다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사고에 갇혀 다른 사람과 소통하거나 감정을 공유하려 하지 않는 인물인 것이다. 이 둘은 비슷한 성격으로 공통된 결말을 맞이할 거 같으나, 예상과 다르게 더피는 결말에서 궁극적으로 깨닫는 바가 없는 한계를 가진 인물이고, 가브리엘은 마비 상황을 벗어나는 인물로 제시 된다. 가브리엘과 더피의 이러한 상반된 결론은 타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볼 기회를 갖는가 못 갖는가에 따라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체적 각도에서 봤을 때 이 둘이 다른 결말을 맞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A Painful Case 는 더피의 내면세계만을 독백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반면에 The Dead 는 가브리엘과 타인이 대화하는 외부적 서술과 더불어 가브리엘 혼자만의 내부적 서술까지 모두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내면세계만을 묘사한 이야기와 내면과 더불어 외면세계까지 묘사한 서술 방식이 극중 화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살펴보면 어떻게 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각 소설에서 주인공인 두 인물이 다른 결말을 맺게 된 데에는 어떤 것들이 영향을 미쳤는지 그들의 성격과 서술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A Painful Case> 의 더피를 살펴보자. 더피를 한 단어로 나타내라고 하면 나타낼 수 있을 정도로 가장 특징적인 단어는 ‘Chapelizod' 이다. 더피는 단순히 금욕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금욕과 현세적인 것에 대해 경계를 나누고 그 범위를 넘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아주 엄격하게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일부러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살고, 집에는 카펫도 깔려 있지 않으며, 벽에 어떤 사진도 걸려있지 않다. 또한 집의 가구가 모두 직접 고른 것이라던가, 책을 두께에 따라 진열해 놓은 것 등에서 금욕적인 성격에 이은 그의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을 엿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정신적인 삶만을 영위하기 위해 어떤 동료나 친구도 없고, 교회를 다니거나 신조를 가지지도 않으며, 사회적 풍습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독단적인 생활을 이어나간다. 또한 3인칭 주어와 과거형 동사를 사용해 자신에 대한 단문을 짓는 버릇을 보이기도 한다. 더피는 행여나 자신이 금욕의 범주 안에서 벗어날까봐 지속적으로 자아 성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또한 금욕을 추구한다는 명목 하에 다른 사람과 전혀 교류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자신을 관찰하며 글을 쓰고, 다른 이와는 일말의 소통도 하지 않는 폐쇄된 더피의 삶을 보여준다.
이 같은 더피의 자기중심적인 모습은 The Dead 의 파티에서 연설하는 가브리엘의 모습에서도 발견 할 수 있다. 가브리엘은 아이버즈로부터 친영파라는 비난을 받고 난 후 연설에 그녀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첨가하고 혼자 흡족해한다.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그는 상했던 자존심을 회복한다고 스스로 느끼고, 다른 사람의 기분은 상관없이 혼자 만족하는 것이다. 또한 가브리엘은 연설 도중 자신을 자유분방하고 진보적이며 미래를 지향하는 국제적인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이모들을 'his aunts were only two ignorant old women' 이라고 비난한다. 당시 아일랜드 식민지 상황에서 여성이 이중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모들이 교육을 받지 못해 다소 무식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더피는 이 같은 이모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면서 더피는 모든 상황과 사람들의 행동을 오로지 자신만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기 세계 안에서 결론을 내리는 태도를 보인다.
가브리엘의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부족한 모습은 'He wanted to say that literature was above politics.' 라는 문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문학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태도를 보이며, 지식이 감정의 즐거움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무시하는 태도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무시하고 이해하지 않으려는 가브리엘의 태도로 귀결된다.
더피와 가브리엘은 자기중심적인 태도와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말에 공감하고 소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더피를 보면 그는 자기 혼자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그렇지만 소설 곳곳에서 그가 자신의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을 만날 것 같은 암시가 곳곳에 보인다. scarlet rug 나 Bile Beans 광고 등이 그것이다. 예상하는 대로 그는 시니코 부인이라는 돌파구를 만난다. 그녀는 첫 만남에서부터 더피에게 아주 거리낌 없이 대화를 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시니코 부인의 대담한 행동으로부터 더피가 놀라는 장면을 통해 독자들은 그녀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소통하려는 여성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또한 더피는 시니코 부인에게 책을 빌려 읽고 매일 같이 만나며 서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것들을 보면 잠시나마 그가 다른 외부인과 소통하는 듯한 착각에 들게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자신의 생각과 관념, 지식 즉 이론적인 것을 그녀에게 단순히 주입시키고 있고, 시니코 부인은 그것을 그대로 듣고만 있을 뿐 그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는다. 시니코 부인은 더피와 감정을 ‘교류’ 하는 사이가 아닌, 그의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을 고상한 언어를 사용해서 표출할 수 있는 ‘수단’ 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듯 했지만, 실은 더피 혼자 그녀에게 일종의 강의를 펼치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강요하는데 그쳤던 것이다.
가브리엘에게 나타나는 소통의 부재적 모습은 주로 그가 아내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난다. 그레타가 아이버스의 서부로 여행을 가라는 추천을 듣고 그렇게 하자고 가브리엘에게 말하자 그는 바로 그것을 묵살 시키고 만다. 그러면서 자신의 추천대로 유럽에 가야 한다고 자신의 생각만 말하는, 소통이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그는 그레타가 파티에서 노래의 곡조에 심취해서 가만히 감상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궁금해 한다. 같이 그 음악을 들으며 감상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만 그 상황을 분석해보려는 가브리엘은 그레타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또 자기혼자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아내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제목을 붙일 것인가까지 혼자 정하고 있다. 이는 음악 그 자체에 대해 아내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만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공감과 소통의 부재를 보여준다.
이제 비슷한 성향을 지닌 두 인물이 어떻게 다른 결말을 맞게 된 것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 원인에는 타자에 대한 이해의 유무와 문체적 측면 두 가지가 있는데, 우선은 타자에 대한 이해의 유무를 살펴보자.
A Painful Case를 살펴보면, 곳곳에서 더피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될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한 부분이 있다. 초반에 그의 집 배경을 설명 하는 부분에서 그의 책상 안에 있던 over-ripe apple 도 더피가 궁극적으로 마비를 경험할 것을 상징한다.
또한 그가 노동자들에 대해 시니코 부인에게 얘기하면서 ‘the interest they took in the question of wages was inordinate'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더피가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공감능력이 부족하며, 그가 노동자들의 삶을 실천적 차원이 아닌 단순한 이론적 차원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를 지녔음을 보여준다. 하층민의 어려운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철학적인 얘기만 펼치는 더피는 아직까지도 타자의 입장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마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마비에서 벗어나지 못 할 가능성은 시니코 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시니코 부인은 더피가 ‘We are our own' 이라고 말한 것에서 'We' 가 드디어 더피가 타인을 수용하는 태도를 지닌 것으로 오해하고 그의 뺨을 격정적으로 만진다. 하지만 더피는 이러한 그녀의 행동에서 환멸을 느끼며 헤어진다. 더피가 말하는 ’We' 는 타인이 배제된 ’나‘와 ’나 자신을 위한 나‘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피는 아직까지도 타인을 수용하지 못하는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또 더피가 시니코 부인과 보냈던 시간은 진정한 소통과 교류가 아니었으며,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피가 시니코 부인의 죽음을 신문 기사를 통해 접한 뒤 그가 느끼는 기분을 통해 우리는 더피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신문기사의 진부한 문구와 값 싼 동정, 진실을 숨기려는 듯한 조심스러운 말은 이전에 더피가 줄곧 추구했던 3인칭 주어와 과거형 동사를 통한 단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해왔던 방식과 같은 신문기사를 보며 그것이 자신의 것인지 지각하지 못한 채, 그 표현들을 불쾌하게 느끼고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조차 못하는 더피로부터 우리는 그가 마비로부터 벗어날 것이라는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또 그는 시니코 부인의 죽음을 단순히 동정하고만 있다. 그녀의 죽음을 불쌍하다고만 생각할 뿐, 그녀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녀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는다. 더피는 시니코 부인을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시니코 부인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더피가 마비에서 벗어날까 싶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닌 인물로 남고 만다.
문체적 입장에서 봤을 때도 A Painful Case 는 서술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더피의 독백적 언어로만 서술되고 있다. 이는 더피의 주관적 입장만을 서술하며, 다른 사람의 생각 또한 더피의 관점에서 이해한 것만 표현된다. 그렇다보니 이 서술은 절대 객관적일 수 없고, 독자는 더피 개인의 생각만 알 수 있을 뿐 시니코 부인 같은 다른 인물의 생각과 속마음은 알 수가 없다. 결국 더피는 문체적으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세계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에 The Dead 보면 가브리엘은 서서히 타자를 인정하고 이해하려는 성향을 보인다. 파티의 연설을 준비하면서 브라우닝의 시 말고 셰익스피어나 다른 시인의 것을 인용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계속해서 고민한다. 이는 청중들이 시를 이해하는데 어렵지는 않을까 타인의 위치에 서서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아내와 호텔에 가면서 마부에게 차비로 1실링을 더 주는 자비를 베푸는 모습도 보인다. 이는 더피가 노동자들을 냉정하게 대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다. 이를 통해 가브리엘이 서서히 타인의 내적 세계까지 하나의 내적 세계로 인정하며 자아를 확장시켜 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레타의 어린 시절 연인이었던 마이클 퓨리에 대한 이야기는 가브리엘이 인식을 전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준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위해 목숨까지 바친 퓨리의 얘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자신이 아내에게 준 사랑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으며 독단적이었던 것인지 깨닫게 된다. 죽은 퓨리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서서히 사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아 확장의 태도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가브리엘의 태도는 그가 아일랜드 전역에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며, 서부로 여행할 때가 왔다며 서부와 동부를 동일시하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눈을 보며 마침내 타자를 공존하는 존재로 여기며 타자와의 관계를 확장시키는 가브리엘은 마침내 마비를 벗어나는 결말에 이르게 된다. 그는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해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편 The Dead 의 문체적 특징을 보면 가브리엘이 릴리, 아이버스, 그레타, 이모 등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외부적 서술이 많이 등장한다. 또 그가 아내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나, 아이버스의 충고에 대해 기분 나빠하는 감정, 파티 도중 혼자 밖으로 나가 산책하고 싶다는 감정 등 그의 다양한 내적 서술 또한 등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글의 마지막에서 가브리엘은 에피파니를 느끼며 혼자 내적 독백을 하는 것으로 글이 마무리 된다. 적절한 외부와 내부적 서술의 혼재를 통해 그는 서서히 자기만의 세계를 벗어나 타인의 세계에도 발을 들이는 것이다.
나는 가브리엘과 더피에 성격에 대해 분석하면서 공감능력과 소통이 부족한 오늘날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요즘 사람들은 아주 강한 개인주의적 모습을 띄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입장과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것만 챙기기 바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게 된 데에는 치열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약육강식의 경쟁 사회에서 이기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커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같은 사회를 한 번에 완전히 뒤바꿀 수는 없지만 가브리엘처럼 점차 변화하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우리의 사회를 ‘나’ 만의 세상에서 ‘타인’의 세상까지 수용하여 ‘우리’의 세상으로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며 귀 기울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가브리엘이 경험한 에피파니처럼 소통하는 사회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