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항상 창을 통해서만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일까?...426p
자신의 지능이 한참 낮은것을 인지하고선 아이큐가 높아지길 선망했던 빵집 점원 찰리가 과학적 실험대상이 되길 자처하며 신의 영역을 침범한 교수들의 실험에 참여하게 됩니다. 낮은 인지능력 장애를 가진 것 때문에 엄마는 증오와 수치심에 시달리며 그를 버리게 되었고 아빠는 그를 보호해 주지 못하며 엄마에 동조하기에 이르렀지요. 결국 가족과 떨어져 빵집 점원으로 살아온 찰리는 직원들이 그.래.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이였어요. 자신이 똑똑해지면 분명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거란 행복한 기대를 가졌던 찰리는 경과보고서로 시작되는 이책의 첫 페이지를 즐겁게 이끌고 있네요.
이미 의혹을 가지며 찰리를 지켜보게 되는 독자, 수술을 하는 것만으로 찰리의 아이큐가 갑자기 높아진다고? 하지만 어눌한 그의 경과보고서는 점차 제대로 씌여지고 있습니다. 자신처럼 수술을 이미 했던 쥐, 앨저넌의 모습을 바라보면 이미 특혜를 잔뜩 입은 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요. 복잡한 미로를 통과하는 실험을 가볍게 통과하며 머리를 쓰는 앨저넌을 보며 찰리는 첨엔 상처를 받지만 친구처럼 그와 대결을 하는 모양을 취합니다.
그의 상승되는 지능에 대해 응원을 하고 화이팅을 하는 것보다는 아슬아슬 그의 행동에 대해 걱정을 하며 책을 읽어내려가게 되는 셈이에요. 긴 그의 인생속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부터 돌아보는 과정을 거쳐가는데요. 찰리는 낯설고 어리숙한 그의 수술전 모습을 제 3자처럼 표현하면서 존재화 시키는데 참 맘이 아파요. 점점 지능은 똑똑해 지지만 술을 먹는다 던지 할때는 과거의 자신 모습이 드러나면서 극대극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아마도 심리적인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든듯 합니다.
/정말 열씨미 노려칼 꺼다/ 찰리의 이런 글솜씨와 바람은 참으로 힘겹게 유지됩니다. 더해서 주위에선 찰리가 생각한 것처럼 전부 다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도 언짢아 하지 말라는 조언은 퍽 현실적이였어요. 모두 다 친구라고 여겼던 시선들이 자신이 똑똑해지고 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사실은 조롱거리로 삼은 거란걸 알게 되었을때 그 기분은 정말 암담했겠지요.
수술한 뒤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아가 내가 똑똑해졌노라 말하고 싶었던 바람이 있었지만 모든 현상들이 다 헷갈리고 자신의 삶을 알아갈수록 공정하지 못했다는 인상을 받게 되죠. 맘이 퍽 아파요.....
평생에 걸쳐 배우는 것을 단 몇 주만에 이룬다는 장점은 과연 얼마나 유지될까. 찰리는, 찰리는 똑똑해진만큼 자신의 운명을 인식하는 것 같군요. 단지 지식을 얻고 세상과 이해하길 원하는데 뭐가 잘못된 거야? 찰리는 자신이 어떤 사림인지,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인생을 모두 모아 만든 결과물인지 의문을 둡니다. 철학적이고 심리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는 셈이네요. 한순간 모든 다른 박사들을 뛰어넘는 인지를 지녀버린 찰리는 엘저넌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보기 이릅니다. 너무 이른 조바심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며 찰리를 지켜보지만 글쎄요....
과학의 발전은 여기까지 인가요?
나는 왜 항상 창을 통해서만 인생을 들여다 보는 것일까?...426p
모든 것을 인지한 상태로 두가지의 삶을 살아본 찰리,
그가 말하네요. 왜 항상 창을 통해서만 인생을 들여다 보는 걸까? 라구요.
지능인 낮을때도, 너무너무 똑똑한 천재적인 삶을 살아봤을때도 그는 똑같이 극도의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 자신의 인생을 창을 통해서만 바라보게 되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찰리는 엘저넌의 죽음을 지켜보게 되네요. 자신처럼 지능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 일해보겠다는 약속도 했지만 너무 똑똑하면 또 배척해버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도데체 또 뭐란 말이가요. 과학자들에게서 사람취급보다는 실험실 표본취급 당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던 찰리의 모습에서 어느 상황에도 만족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참 허무한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친구는 같은 처지의 앨저넌밖에 없었을 까요. 쓸쓸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 찰리의 모습을 보면서 좀 고통스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