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의 목표는 소개한 책을 읽거나 읽지 않도록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다. 『욕망과 파국』은 서평집으로서 원래의 목표에 충실하게 32권을 소개한다. 여기에 등장한 책들의 갈래는 사회과학, 동화, 소설, 시집 등으로 다양하지만 모두 ‘환경보호’ 또는 ‘생태주의’라는 주제로 귀결된다.
나는 이 책에서 3부가 가장 잘 읽혔다. 저자 최성각은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소설과 환경 에세이를 써냈는데, ‘한 인물을 되짚어보는 글’에서 소설가로서의 필력이 제대로 드러난다. (특히 1부의 비교적 엉성한 짜임새와 비교하면 더욱…)
조종(弔鐘)을 울린다는 소제목에 걸맞게, 니어링에 대해서는 “사람이 마땅히 걸어가야 갈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걸었던 실존적 인간”이고, 소로우는 “문학은 반권력”이라는 가르침을 준 스승이라고 평했다. “아름답게 살다가 가신” 권정생 선생, “문학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 솔제니친, “작가의 길”을 걸어간 “정직한 인간” 세풀베다 역시 저자가 아낌없이 존경심을 표한 인물들이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라는 사람이 수용소에서 하루 동안 겪은 생활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아무런 극적인 사건도 없이 보낸 영하 38도의 시베리아 수용소의 하루가 소설의 전부다.”(156쪽)
저자가 어린 시절 문학에 눈 뜨도록 해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50년 만에 다시 찾아 익은 이유는 시방 전 세계를 당혹과 불안, 공포로 뒤덮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었다.”(158쪽)
게오르그 루카치는 리얼리즘의 신봉자답게 “이 소설이 스탈린 시대를 총체적으로 비판하되, 직정의 방식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고급스럽게 비판했다”(157-158쪽)고 평한 바 있다. 당시의 시대를 리얼하게 반영했다고 칭찬한 것이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가 발간 이후 60년도 더 지난 우리에게도 울림과 깨달음을 준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은 세계의 속성이 있음을 방증한다. 솔제니친은 이 소설을 통해 “세계가 수용소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다.
우리는 100년이 채 안 되는 수명에 갇혀 있고, 공간적으로는 국가주의에 갇혀 있고, 영원히 해소될 길 없어 보이는 불평등과 피부색 차별, 한심스러운 성차별, 장애인 차별의 장벽에 갇혀 있고, 성장 숭배라는 신흥종교의 마법에 갇혀서 살고 있었다. 이번에는 박쥐에 연원(淵源)하고 있는 역병에 기습당황 상황이지만, 인류는 늘 여러 형태의 불가항력적인 힘에 갇혀서 살아오지 않았던가.”(159쪽)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직접 읽어보지 않았지만 저자 최성각과 루카치 덕분에 소설의 분위기와 형태가 얼추 유추되고 흥미로워졌다. 작금의 팬데믹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문학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재앙 속에서도 ‘거의 행복하다고까지 해도 좋은 하루’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능력을 곱씹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업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