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걷기조차도 귀찮아하며,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1~2분만 뛰어도 숨이 거칠어져서 진정하는 데 5분 이상 걸리는… 흐물흐물한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정도로 체력이 조악하기 때문에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의 제목만 봤을 때 솔직히 한숨부터 내쉬었다.(작가님 죄송합니다;;) 설마 첫 장부터 ‘달리기를 하면 당신도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든가 하는 자기계발서의 말투가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단은 출판사를 믿고 책을 펼치기로 했다. 이전에 디귿의 다른 에세이들(『행복의 모양은 삼각형』 등)을 읽고 ‘자기계발’이나 ‘훈계’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즐거운 생활’, ‘슬기로운 생활’에 대한 글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슷한 분위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달리는 여자, 사람입니다』는 달리기의 ‘성공신화’가 아니라 ‘일기’였다. 작가가 달리기를 만병통치약이라고 과대광고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1부 ‘달리는 여자(들)’은 달리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2부 ‘체력으로 하는 사랑’은 러너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후 살아가는 작가의 생활을 담아냈다.
사실 1부는 달리기의 효과로 인해 긍정적인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콘셉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약간은 달리기 만능주의·환원주의적인 면이 있다. 작가는 각각의 꼭지를 교훈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하려는 듯했다. 다음의 인용문은 각 꼭지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한다.
(14쪽) 스스로의 기분에 결정권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자 나는 굉장히 믿음직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달리고 올 때마다 나는 나를 믿고 살아봐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42쪽) 나는 언제고 나와 함께 붙어 있는데, 함께 있는 나 스스로를 좋아하지 못해서 그렇게 타인을 찾아 다녔는지도 모른다. …기꺼이 혼자가 되기 위해 달리러 나간다. 혼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나는 또다시 나 자신을 절실히 돕고 싶어진다.
(60-61쪽) 재능과 무관하게 끝까지 달리는 사람이 이기는 것이 달리기라서… 달리기의 논리 앞에서는 재능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나 자신을 조금 덜 의심하길, 다양한 무언가를 그냥 쭉 해나가길.
이렇게 잘 정리된 문장을 읽으면, 작가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보다는 점잖게 갈고 닦은 글, 그러니까 이를테면 스터디 플래너나 다이어리에 필사해두면 멋질 법한 문장을 쓰는 데 집중했다는 게 티가 났다. 독자에 따라 취향이 갈리겠지만 나는 이런 문장에서 작가가 달리기와 원고에 정성을 갈아 넣은 게 와닿아서 좋았다.
2부에서는 달리기로 얻은 ‘체력’과 그 체력 때문에 가능해진 ‘사랑하는 힘’을 키워드로 꼽을 수 있는데, 작가의 사랑이 동네 고양이에게로 향하는 걸 보며 마음이 데워졌다.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는 작가도 체력이 넉넉하지 못해서 삶이 힘겨웠다고 한다.
(100쪽) 체력 없는 삶의 문제점은 단순히 몸의 피로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간관계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느 관계에서든 일정량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된다면 미련 없이 정리해버렸다. 대화가 사소하게 어긋나거나 가치관이 충돌하면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혼자 마음속에서 밀어낸 친구만 여럿이었다.
(101-102쪽)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몰랐다. 그것이 체력의 문제였다는 것을. 삶에 달리기가 들어온 후로 일상의 많은 일이 대수롭지 않아졌다. …몸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가 늘어나자 나는 조금씩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갔다. …체력이 나쁠 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그게 동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이다.
(103-104쪽) 조금 더 튼튼해진 몸 덕분에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영역의 사랑을 알아가고 있다. 매일 동네 고양이들에게 다정한 ‘냐옹’ 인사를 받기도 하고, 사랑스러운 ‘발라당 배 뒤집기’도 보는 특권을 누린다. …계속해서 다정함을 나누기 위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체력을 기를 셈이다.
동네 고양이를 돌본다는 건 ‘고양이를 찾아다니며 식사를 제공하는 일’과 ‘고양이를 해치려는 사람으로부터 고양이를 보호하는 일’을 동시에 수행할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특히 후자의 경우 수모를 당하며 체력과 자존심이 깎이기 때문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상황에서 잡념과 스트레스를 벗어 버리기 위해 작가는 달리기를 한다고 말한다.
(130-131쪽) 내 수많은 자아 중 캣맘 자아와 달리는 자아의 차이는 엄청나다. 히어로 무비에 자주 나오는, 평소에는 나약한 주인공이 옷만 갈아 입으면 갑자기 초능력을 얻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설정이랑 비슷하다. …스스로가 너무나 약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마다 그것을 반증하기 위해 내 안의 러너 자아가 나서준다.
전반적으로 좋았으나, 조금 아쉬운 부분이 두어 군데 있었다. ①본문 22~29쪽에 해당하는 꼭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거팬츠를 입은 사람이 표지에 그려졌다면 고증(!)이 완벽했을 텐데 짧은 반바지를 입은 러너가 표지에 들어가서 약간 아쉽다. ②125쪽에서 인용한 『떨림과 울림』의 문장들을 큰따옴표로 묶기만 하고, 각주 등 별도의 방법으로 출처를 명기하지 않아서 아쉽다. 이 부분은 『떨림과 울림』 본문 49쪽에 해당한다.
선천적인 체력은 약하지만 후천적으로 계발한 지구력, 그리고 사랑에 대해 읽으면서 ‘인간 손민지’를 알 수 있어서 좋은 책이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훈련으로 얻는 것이 많아진다는 것, 사랑하기 위한 체력을 부지런히 기르는 것 말이다. 손민지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 달리는 여자, 어른이다.
※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