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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인간혐오자

[도서] 읽기 쉽게 풀어쓴 현대어판 인간혐오자

몰리에르 저/김혜영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맞아! 나는 인간의 본성이 끔찍할 정도로 혐오스러워.(p16)"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때, 완전한 사랑을 이룰 수 있습니다.(p59)" 과연 알세스트다운 말인데 그의 평소 지론을 감안하여 해석하자면 완전한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선 상대의 과오가 보이지 않으니 뭘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는 뜻 같습니다. 바로 다음에 "키가 큰 여자는 기품 있는 여신처럼 보인다고 하고, 키가 너무 작으면 경이로운 하늘의 축소판이라고 하고.." 운운하는 엘리앙트의 대사도 이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수백 년 후, 소설가 에릭 시걸의 통속물에 나오는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란 유명한 구절이 혹 몰리에르의 이 고전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는, 알세스트가 그토록이나 우려하는 그의 벗 필랭트의 "아무한테나 친절하며 누구한테나 똑같은 얼굴을 하는(p12)" 유감스러운 태도와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습니다. 필랭트 역시 그가 상대하는 다른 이들의 단점이 안 보여서 저런다고 합리화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극 중반인 2막 5장에서 법원 관리인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물론 몰개성의 장치에 가깝지 캐릭터와는 거리가 있겠습니다만 몰리에르의 다른 대표작 <타르튀프>에서도 그러했듯 어떤 법원 관리가 갑자기 나타났다 하면 뭔가 큰 흐름이 바뀐다는 예고입니다. 오롱트는 알세스트한테 그렇게나 큰 호감을 갖고 접근했었으며 자존 따위는 완전히 버린 채 정직한 우정을 고백했는데 알세스트라는 인간은 상대가 느낄 수 있는 극한의 모멸을 선사하는 개매너로 응답했으니 오롱트 입장에서야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앙갚음을 해야겠다고(ㅋ) 마음먹었을 만합니다.

반면 같은 직언을 해도 아르노지에 부인 같은 노숙한 이가 "당신께서는 살아가는 방식에 다소 잘못이 있으며...(p77)"라고 상대가 알아듣게끔 조곤조곤 설득하는 품은 제법 성숙한 인품 같은 것의 방증입니다. 상대의 자존을 완전 박탈하는 모욕적인 직설 한 단계 위에 필랭트식의 세련된, 만인을 향한 아부가 위치한다면, 이처럼 할 말은 다 하면서도 상대로부터 흔쾌한 승복을 끌어낼 만한 기술이 사교 소통의 최고난도 단계일 것입니다. p77에 "아부도 셀리멘 부인을 두둔하지 않았습니다."에서 "아무도"가 바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갓 스물에 벌써 "부인" 타이틀을 단 셀리멘의 응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르노지에 부인의 충고 속에 뭔가 자신을 평소부터 고깝지않게 여겼음이 슬쩍 암시되는 가시를 감지하고, 당신의 조언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했다는 가식적 전제를 깔고서는 바로 반격을 가하는데 더도덜도 아닌, 딱 받은 만큼만 돌려주겠다는 칼날 같은 공격이 들어옵니다. 어쩌면 셀리멘은 아르노지에의 적의를 제대로 꿰뚫어봤는지도 모릅니다. p22 필랭트의 대사 "점잖은 아르노지에가 한없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자네(알세스트)를 바라보았는데"를 보면 아르노지에 부인은 셀리멘에게 연적으로서의 적대감을 진즉부터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셀리멘은 애초에 만인의 관심을 즐길 뿐 누구 한 사람한테 진득한 애정을 키우는 타입이 아니므로 여기서 슬쩍 알세스트를 아르노지에에게 밀어주고 더이상의 소모적 기싸움(여성들 특유의)을 피하려 듭니다. 둘만 남게 되자 아르노지에는 알세스트의 (셀리멘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깨 주겠다는 듯 집요한 설득을 통해 상대의 열정이 자신에게로 방향을 바꾸려고 합니다.


알세스트는 이처럼 어떤 자신만의 환상이 깨어지는 걸 무척 두려워할 만큼, 냉소주의자 특유의 냉철함을 갖추지 못한 유형입니다. 사실 그에게 과연 인간혐오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을 만한지도 의문스러웠습니다. 과연, 법정에 불려가서 혼이 난 후 자신이 그토록 멸시하던 오롱트에게 낯 깎여가며 평판을 양보하고 왔으니 앞으로 자존을 어떻게 유지할지 걱정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타격을 받은 건 이 법정 패소가 아니라 셀리멘의 "배신, 부정"이었습니다. 애초에 이 여자가 알세스트에게 뭘 약속한 자체가 없었으니(p106) 그야말로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셈이라 더 우습습니다. 종국(6막)에 서신 폭로 소동을 거치며 ooo이 개망신을 당하고 사교계에서 매장당하는 듯 보이지만 진짜 패자는 알세스트인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을 혐오(?)하려면 제대로나 했어야 했는데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지론 속에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나르시시즘과, 사랑으로 착각한 얕은 욕정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다 처음부터 기반이 부실했던 에고가 완전히 박살이 난 셈이 되었으니.

"완벽한 이성을 지니고 싶다면 생각이 극단적으로 치우치지 않게 절제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해(p18)." 이미 절친 필랭트는 완벽한 정답을 알고 있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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