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형무소에서 어느 수감자가 자신이 처형시킨 인물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 볼셰비키의 우두머리라는 한인 여성이 있었다는 고백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대(代)를 이어 착취 받는 이들을 대변하다.
김두서(金斗瑞)는 생존을 위해 고향인 함경북도 경흥을 떠나 북으로 갔다. 그는 한국, 중국, 러시아의 접경지인 지린[吉林]의 훈춘[琿春]에서 잠시 소작농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 러시아로 이주 후에는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러다가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시넬니코보[永安坪]에 정착하면서 귀화하여 표트르 김이 되었다. 그의 어학 능력 때문에 동청철도(東淸鐵道)1) 현장에 파견된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징집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차별 받고 심지어 임금체불마저 당하는 한국과 중국 노동자를 위해 철도관리국에 항의하거나 노동쟁의를 벌여 못 받은 임금을 받게 해줬다. 이렇게 명성을 떨쳤지만, 제대하고 나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딸인 김알렉산드라[1885~1918,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애칭은 쑤라]는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친구였던 폴란드 귀족 출신 러시아인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교사가 되면서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아들 마르크 스탄케비치(이하 ‘마르크’)와 결혼을 했다. 한때 사상적 동지였지만 항만노조 일을 돌보느라 며칠씩 집에 오지 않는 그녀를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도박에 빠지고 폭력을 휘둘렀다. 결국 스탄케비치 가문의 귀신이 되라는 남편의 저주를 뒤로 한 채 그녀를 집을 떠났다.
여기에 우랄로 떠난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그녀는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1914년 우랄의 벌목장에 통역으로 간 것이었다.
“2월 혁명 전야의 파도는 우랄까지 당도했다.
난 이 문제를 러시아 사회민주당 예카테린부르크 지부에 편지를 보내 우랄 목재소의 지옥 같은 상황을 고발했다. (뤄쯔거우[羅子溝] 무관학교 출신) 생도들과 한인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전폭적으로 날 지지했고, 점점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들의 억울함을 자세히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수없이 꼬인 문제들을 풀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p. 174]
이를 기반으로 그녀는 우랄 노동자 연맹을 조직했다.
“감격의 순간이군요. 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러시아·중국 노동자, 일제의 강점에서 독립하고자 투쟁하는 한인, 오스트리아 포로병, 그 모두가 우리의 동무입니다. 노동과 계급의 형제, 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도울 동지입니다. 얼굴도 다르고 피부색과 국적도 다르지만 일하는 자로서 하나입니다. 만세!” [p. 185]
나아가 그녀는 2월 혁명 직후 차르 정부가 미지급한 노동자 임금을 받아내서 명성을 얻었다.
전환점, 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1917년 그녀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접견하고, 그의 오른팔이자 탁월한 조직가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1885~1919)의 요청으로 하바롭스크로 파견되어 극동인민위윈회 조직에 참여한다. 1918년에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외무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같은 해에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등과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2)을 결성한다. 다만, 김알렉산드라가 사회민주당 당원이었기에 직책은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동휘와 함께 100명 규모의 ‘한인사회당 적위군(赤衛軍)’을 조직, 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반(反)혁명세력인 러시아 백위군(白衛軍)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그 해 9월 하바롭스크가 함락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백위군에 발각, 체포된다.
이후 재판관이 그녀에게 “만약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p. 225]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 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 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 몇 년 뒤에 극동에서, 조선에서, 중국에서, 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 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 [pp. 225~226]이라고 반박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혹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그녀가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 하지만, 그녀가 혁명가로서 살아가고, 또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결국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능하고, 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녀와 같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삶이 가능해졌으니까. 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 계급과 지위, 민족과 인종의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녀의 꿈을 지금 우리가 나눠서 꿈꾸면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옥의 티
p. 203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한일사회당)이 탄생했다.
→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한인사회당)이 탄생했다.
1) 동청철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내몽골[內蒙古] 자치구 만저우리[滿洲里],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쑤이펀허[綏芬河], 그리고 남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 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잇는 철도 노선이다.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는 중동 철도(中東鐵道)라고 불렀다.
2) 임시 의장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부위원장 오와실리[한인 2세, 김알렉산드라와 사실혼 관계], 군사부장 유동열(柳東說, 1879~1950), 당 기관지 <자유종> 주필 겸 출판부장 김립(金立, 1880~1922),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 이인섭(李仁燮, 1888~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