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없이는 내 시도 예술도 없다. 하얀 것, 여자, 그것은 내 육신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내 생활, 내 사상, 내 이념, 내 모든 것의 모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338p)
다니자키 준이치로, 그는 일본 탐미주의 문학의 거장이라고 한다. 이 탐미주의라는 게 아름다움을 극상으로 끌어올려 주기도 하지만 그에 수반되는 쾌락이나 퇴폐적인 감정은 결코 아름답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평생 여성을 숭배하고 여성(여체)의 아름다움에 몰두해서 작품을 써내려간 작가이니만큼 여자라면 반색할 만하다. 페미니스트 기질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한국처럼 남녀의 성차별이 오랫동안 지속하여 온 곳도 드물기에 더욱 그러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유독 성에 대해 여전히 개방적이지 못하다. 그렇다고 성적 발언을 서슴없이 토로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서적으로 과하게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내가 자라면서도 가족 간에 입 밖으로 꺼내기는 불편한 주제였다. 그렇다 보니 나이가 들어도 성에 대해 선뜻 말하기가 꺼려진다. 이에 책이라는 매개는 궁금증과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절대적 존재가 돼준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남들이 쉽게 읽으려 하지 않는 소재나 선정적인 문구에는 더 호기심이 일기 마련이다. 세간에 오르내리고 금서가 되고 비난과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 작품은 더 그렇다.
여인을 향한 절대 명제-아름다움, 그 탐미적 세계를 엿보다.
<만(卍)>과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두 작품 모두 남자들의 눈과 마음을 홀리는 치명적인 아름다움, 매력을 지닌 '요부'같은 여인이 등장한다. <만(卍)>은 한 여자를 두고 부부와 한 남자, 세 명의 남녀가 한 여인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과연 사람의 성적 욕망의 임계점은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한 여자에 의해 휘둘리는 인간의 본능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이 이성이 아닌 동성에게까지 미치는 부분은 작가의 미에 대한 예찬은 끝이 없다는 걸 잘 나타내고 있다. 여중·여고를 졸업한 나는 이런 끌림(동성애)을 느끼는 아이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 시절에는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고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애정이 깊어서 그렇다고 받아들이곤 했다. 동성애라는 것도 일종의 '다름'으로 받아들이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더라. 하지만 <만(卍)> 안에서는 도덕적인 비난을 피해 갈 수 없을 정도로 그 수위(정신적)가 높다. 부부가 한 여자를 두고 성적 패러다임을 구현하는 격이니 말이다. <만(卍)>이 파격적인 동성애와 이성애를 그렸다면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같은 경우는 제목에서 나타나듯이 모친에 대한 사모의 마음을 절절히 묘사하고 있다. 시게모토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전형을 잘 나타낸 예라고 볼 수 있다. 작가 역시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마음이 남달랐기에 작품과 실상을 동일시하는 그의 가치관이 특히나 더 잘 나타난 작품이 아닌가 한다. 타임스에서는 다니자키를 동양의 D.H. 로렌스라 칭송했는데, 우리에게 『채털리 부인의 연인』으로 유명한 D.H. 로렌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일종의 연인과 모친의 중간적인, 일반인들이 쉽게 수용하기 벅찬 기묘한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삶과 작품에 임하는 이들의 시선이 더 남달랐던 건지도 모른다.
작품과 현실의 동일시성은 창작열의 원동력.
흔히 문학이 그 시대상을 대변한다고도 하는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만큼은 예외라고 해야겠다. 시대상을 포착하고 투영하기보다는 그 시대를 구성하는 주체인 개개인의 욕망에 더욱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철저히 개인에 의한 이야기만을 서술한다. 보다 내밀한 개인의 은밀한 욕구, 탐욕, 질투 같은 원초적 욕망을 중심으로 이끌어나가기에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사람이란 욕망하면서도 그 욕망을 거울로 비춰보기는 불편해하는 게 정상이니까.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역시 그러한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닌가 한다. 그의 소설은 상당히 은밀하고 섬세하다. 그의 실생활도 소설 같다. 그가 추구하는 탐미주의 문학이 곧 예술이고 작품화한 내용대로 삶도 비슷하게 흘러간 고집스러운 에고이스트기도 했다. 자신의 예술 활동에 방해요소로 작용할까 봐 사랑하던 사람과의 아이조차 낳기를 거부했으니 말 다한 거 아니겠는가. 작품과 현실의 동일시성은 그의 창작열의 원동력이나 마찬가지다. 두 편의 작품은 그 색채가 같은 듯 다르다. 한 작품은 시종일관 주인공의 회상, 고백으로 이어지고 한 작품은 과거 존재했던 인물을 두고 작가의 상상이 가미된 작품이다. <만(卍)>은 약간의 불편함을 전제하고라도 막힘없이 읽힌다 할 수있고, <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는 여성의 아름다움에의 탐닉이라는 주제의 일치성을 배제한다면 다른 작가의 작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려한 문체를 구사했기에 소재에서 오는 진부함을 뛰어넘는다. 그의 작품 세계를 선정적인 에로티시즘 소설로 볼 수도 있겠고 외설도 하나의 예술이라는 외침처럼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줄 만도 하다.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라. 이 작품집 안에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성행위 같은 건 있지 않다. 육체적 쾌락보다는 감정적인 쾌락과 은밀함이 산재하기에 임팩트가 큰 것뿐이다.
때로 작품과 작가의 삶이 판이한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어떤 이상과 이상향을 추구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작품뿐 아니라 삶조차도 한 편의 소설과 다름없기에 더 호기심이 이는 작가다. 삶과 작품을 일체화한 작가이기에 그의 작품이 외설이나 난잡함의 표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지나치게 여성성을 부각하고 숭배시하기에 어떤 이에게는 반감을 사기도 할 것이다. 역자도 언급했듯 그의 작품 안에는 순수와 순정한 사랑은 찾아보기 어렵다. 시게모토의 어머니에 대한 마음만이 순정할까. 그 외에는 여체에 얽힌 애증과 애욕, 갈등이 주요소다. 작가의 고집스러운 에고이스트 기질은 그의 삶과 작품마저도 철저하게 개인주의로 변모시켰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자신만의 독자적인 에고는 필수 불가결한 것 아닐까. 오로지 여인에 의한 작품을 구현한 그의 탐미적 예술 세계는 한 번쯤 탐독 해볼 만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매력적인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