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할 때는 초콜릿이 좋다. 한없이 침잠하는 기분은 진한 달콤함으로 옅어지는 효과가 있다. 책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어떤 책도 잘 읽어지지 않을 때는 로맨스나 추리 소설을 찾게 된다. 달콤하거나 오싹하거나. 강렬한 감정 체험으로 책의 재미를 되찾는 방법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중독 수준으로 매일 로맨스 소설을 읽었던 때가 있다. 지금은 일반 소설에 밀려 자주 찾지 않지만 독서의 탄력성이 떨어졌을 때 찾는 책은 거의 로맨스 소설이다. 이 책도 그런 연장선으로 오래 전에 소장한 책이다. 이왕이면 초콜릿처럼 달콤한 사랑 이야기가 좋다. 애틋하면 더 좋다. 감정 이입이 절로 되니까. 대부분 줄거리를 모른 채 책을 선택한다. 이 책은 달랐다. 장기 베스트셀러이기도 했고 독서의 흥미를 잃었던 때 로맨스 소설을 읽을 마음에 찾아본 책이라 결말은 모르지만 대강의 내용은 알고 선택했다.
줄거리 자체는 슬플지 몰라도 대개의 로맨스 소설은 해피엔딩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해피엔딩을 꿈꾼다. 삶도 내가 읽는 소설의 결말도. 그러나 바람과 다르게 현실은 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때는 어떤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실망과 안타까움 같은 모호한 감정이 우선된다. 환자와 간병인으로 만난 남녀는 사랑과 삶의 조력자라는 아슬한 상태에서 머문다. 한 사람은 미래의 청사진을 그릴 수 없어 체념한다. 결국 못다 한 생을 그녀에게 남기고 떠난다. 모든 사랑 이야기가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로 끝나기를 바란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맺어지지 않는 관계 앞에서 때로는 화나기도 한다. 현실이 모두 해피엔딩이 아니니까 픽션에서라도 대리만족을 꿈꾼다고 해야 할까. 사랑도 현실이다. 『미 비포 유』를 통해 확인한 사실이다. 아무리 이상을 꿈꿔도 현실 앞에서 어쩌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기적을 바랐다. 기적은 없었다. 대신 현실이 남았다. 어쩌면 남자 주인공 윌이 남긴 것이 기적일지도 모른다. 한 여자의 삶을 인도해줬으니까. 트라우마와 가족에 치여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한 여자를 세상 속으로 걸어가게 해줬으니까.
오롯이 자기가 중심이 되는 삶을 살지 못할 때의 고통을 쉽사리 짐작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불의의 사고로 모든 걸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장애를 떠안게 되는 삶의 무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건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니까. 아니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으니까. 아래가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로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지 않을까. 도와주는 이가 없으면 몸을 가누는 것도 힘든, 순전히 타인에 의지해야 하는 삶 앞에서 말이다. 윌의 선택은 분명 극단적이다. 하지만 그의 선택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는 것은 상황이 전하는 무게 때문이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게 삶이 전하는 우여곡절이다. 하물며 사지마비환자인 그에게 가해졌을 고통의 크기는 본인 외에는 짐작 불가하다. 스스로 삶을 재단할 수 없는 현실, 본인 의지가 아닌 타자의 의지가 주가 되어버리는 삶, 상상만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능동적으로 삶에 임하기를 원하면서 성장한다. 평생을 수동적으로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야 한다면 삶을 향한 불씨가 사그라지는 건 당연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삶이 먼저인가 사랑이 먼저인가. 책을 읽고 난 후 가장 먼저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물론 삶이 먼저일 것이다. 삶이 지속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는 건 당연하므로. 하지만 사랑 때문에 삶이 유지되는 경우도 보게 되는데 그건 너무 위태로운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랑에 인생을 걸어버린 후 사랑이 끝나버리면, 삶도 종말을 고해야 할 것만 같은 비약을 내재하니까. 사랑도 내가 삶을 제대로 영위할 때 가능하다는걸, 상기한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질문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는 인생을 건 딜레마가 될지도 모른다. 삶은 영위하나 사랑이 없으면 메말라버리는 것처럼 반대도 주체적인 삶이 없으면 순전히 사랑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삶이 된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멀뚱멀뚱 눈만 뜨고 숨만 쉬는 생물에 지나지 않는 무기력감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그건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게 아닌 게 된다. 본인 의지로 삶을 재단하고 도전하며 성취하길 원하는 게 인간 본성이다. 그에 반할 때, 삶의 가치를 상실하는 건 피할 수 없다.
사람은 웬만해선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습관은 바뀔 수 있어도 본성은 바뀌기 어렵다는 거다. 인생의 변화를 꾀하는 건 더욱 그렇다. 타자의 영향으로 내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믿고 있다는 거다. 누군가로 인해 바뀔 수 있다는 건 그만큼 순수한 사람이라서 가능한 거라 본다. 눈물 콧물 펑펑 쏟을 줄 알았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콧날이 시큰한 정도. 눈물보다 안타까움이 먼저였다. 이 안타까움은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계속된다. 윌의 선택을 책망하는 나를 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납득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But.... 계속해서 맴돈다. 그 방법밖에 없었는지, 죽음이라는 것을 그저 운명에 맡기면 되는 게 아니었는지. 『미 비포 유』는 로맨스 소설의 통념을 깨는 동시에 삶의 연속성, 주체적인 삶, 사랑, 가족의 유대 등을 되짚어보게 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애틋한 사랑이 주가 아니라 삶 안에 따라오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을 융합했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다가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유다. 비록 윌의 선택을 저지할 수는 없었지만 자기로 인해 누군가의 삶을 인도해줄 수 있었다는 기억으로 그는 행복한 안식을 맞이하지 않았을까. 그랬을 것 같다. 불꽃 튀는 사랑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삶의 가치와 연속성을 돌아보게 하는 울림이 있는 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유 또한 그러하니까. 미약하게 태어났으나 누군가의 삶에 방향 제시를 해줄 수 있었다는 것, 대단한 일임이 분명하다. 마지막까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떠난 삶, 윌의 삶은 그러했다. 그랬기에 감동이 있다. 누군가에게 빛과 소금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인생길의 밑거름이 되어준다는 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