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부터 9살까지, 소녀의 눈에 비치는 1930년대 미국 남부 작은 마을의 모습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모두가 같은 사람일 뿐임에도 다른 삶의 방향을 택했다고 해서 사회의 격리대상, 낙오자로 못 박고 피부색에 따라 차이와 차별이 존재한다. 어른의 눈에는 흑과 백의 이분법적 논리가 세속적인 이념이나 통념으로 정리된다 하더라도 아이들 눈에는 그렇지 않다. 보다 인간 본연의 양심에 무게추를 기울이고 있으며 선명한 해답을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지금 어른이 된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래서 이 작품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리라.
소설은 정확히 두 포인트로 압축할 수 있다. 어린 치기로 문제를 일으킨 후 내내 은둔해서 살고있는 주인공 스카웃의 옆집 아저씨 부 래들리를 향한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바라보는 시점이 하나이고 젬과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가 맡게 된 흑인 톰 존슨의 백인 강간 사건의 재판을 다룬 법정에서의 일련의 과정을 다루는 게 또 다른 하나이다. 이 두 포인트 모두 '편견'과 '차이'의 원론적인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른들의 대치 상황을 보여주면서 아이의 시선으로는 어떻게 상이하게 보여지는지 스카웃의 솔직한 감정 고백에서 읽어낼 수 있다.
"내 생각으로는 오직 한 종류의 인간만이 있을 뿐이야. 그냥 사람들 말이지."-420쪽
1960년대에 하퍼 리가 말했지만 여전히 이 소설이 말하고 있는 차이와 편견, 관용, 이해와 같은 것들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금의 세상이다. 책 속에서 말하는 단 하나의 인간 부류인 사람이 존재하는 한, 인류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매일 아침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폭력 사태의 중심에는 인종과 계층 간의 차이가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비단 피부색의 차이뿐 아니라 나와 너의 차이에서 기인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하는 일도 비일이재하다.
나도 분명 스카웃만한 나이였을 때는 호기심 많고 맑은 눈을 가진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 시절에는 보이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보이는 것 이면의 다른 무엇, 더 거대한 알레고리를 생각할수록 때로는 비양심적이고 때로는 비겁한 어른의 모습을 보일 때도 더러 있다. 차이와 다름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은근슬쩍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아니꼬운 시선을 보냈던 경우가 분명 있었다. 고백하는 지금도 앞으로는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청렴하게 살고 싶고 양심적인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 있는 사람도 처음부터 악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의 신념을 관철하고 우직하니 지켜나가기에는 세상의 숨겨진 함정이 너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스카웃, 단순히 변호사라는 직업의 성격으로 보면 모든 변호사는 말이다, 적어도 평생에 한 번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사건을 맡기 마련이란다. 내겐 지금 이 사건이 바로 그래. 이 문제에 관해 어쩌면 학교에서 기분 나쁜 말을 듣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나를 위해 한 가지만 약속해주렴. 고개를 높이 들고 주먹을 내려놓는 거다. 누가 뭐래도 화내지 않도록 해라. 어디 한번 머리로써 싸우도록 해봐...... 배우기 쉽지는 않겠지만 그건 좋은 일이란다."
"아빠, 우리가 이길까요?"
"아니."
"그렇다면 왜."
"수백 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하기도 전에 이기려는 노력도 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없으니까."-148~149쪽
태어나는 시점에는 모두가 평등했다. 굳이 인간을 결백한 평등의 기준으로 나눌 수 있는 때는 이 시기뿐이지 않을까 싶다. 그 후는 자기 스스로 혹은 사회의 테두리 속에서 변화하는 평등의 관점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시켜주는 작품이 『앵무새 죽이기』다. 죄 없는 앵무새가 더 발생하지 않으려면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에 대한 선결과제를 안겨주면서 말이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고 주변에서 많은 분이 추천한 책이기에 읽기 전부터 기대감이 있었다. 재미와 생각의 관점 차이를 떠나서 읽고 난 지금은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하나 올려둔 기분이다. 나는 아직도 미완의 어른이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도 타자에 대한 배려와 이해, 다름의 문제에서는 계속해서 미완의 어른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 아닌 우려감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정의와 양심, 신념과 용기의 상관 관계란,
표면적으로 재판의 결과만 두고 보자면 이 책에서 정의는 죽어있다. 몇몇 깨어있는 등장인물을 제외하고 아직 양심이라는 뿌리가 자라지 않은 아이의 눈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정의롭게 산다는 것,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 용기를 갖고 삶에 임한다는 것, 뚜렷한 신념으로 험난한 세상에 부딪혀 맞선다는 것, 어느 것 하나 쉽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저 기억하며 살아가려고 애쓰면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는 항상 품게 될 것이다. 양심과 정의가 죽어가는 시대에 이런 소설이 살아있어서 다행이지 싶다.
영원히 품고 살아가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 아닐까, 양심이란, 정의란, 신념이란, 용기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이 모든 것을 선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니더라. 그래서 미완의 어른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인간이란, 사람이란, 언제까지나. 그래서 항상 고민이 따르고 선택이 따르는 게 아닐까. 인생이란 덧없다고 말들 하지만, 이런 고민 속에서 한층 더 자라는 우리, 어른이 있는 것 같다. 성장소설이라는 기틀을 갖추고 있지만 아이가 아닌 어른이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런 데 있지 않나 한다. 우리는 언제나 미.완.이라는 단어의 인간으로 남을 수밖에 없으므로. 지금, 아니 어쩌면 평생을 말이다.
"무엇보다도 간단한 요령 한 가지만 배운다면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낼 수 있어. "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거야.""네?"
"말하자면 그 사람 살갗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다니는 거지."-64~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