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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쓰여진 시/윤동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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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의 시를 읽을 때면 부끄러워 진다.

 시가 쉽게 씌어진다고 부끄러워진다던 윤동주씨는 실제로 시를 쉽게 쓴 적이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조국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했었다.

 지금의 나는 어떤가.

 아무 생각없이 관성에 따라 시간을 보내며 삶을 너무 쉽게 살아가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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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수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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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ssang

    제가 좋아하는 시인의 좋아하는 시네요.
    오늘도 할일이 무언지 멍하니 이리저리 생각만 많았는데. 시보고 가슴이 잠잠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소중하길 빕니다.

    2012.03.05 11:32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윤동주씨의 [서시]가 우리나라의 애송시 1위를 지킨 그 긴 세월이 있는만큼 윤동주씨의 시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참 많아요. 저도 윤동주씨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이 초등학교 때였는데 이젠 왜 좋아하게 되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네요.^^

      2012.03.05 14:49
  • 파워블로그 키미스

    저는 시집을 거의 안 읽는답니다. 읽으려고는 하는데 안 읽힌달까요?;; 헌데 윤동주님의 시는 가끔 읽는답니다. 카스트로 폴로스님 덕분에 가장 좋아하는 윤동주님의 시를 오늘 한번 더 읽을 수 있었네요.^^*

    2012.03.05 11:35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요즘 머리에 자꾸 떠오르는 시구가 있는데 그게 다 윤동주씨의 작품이네요. 아는 작품이 별로 없어서인지 제가 안으로 침전하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어요.^^

      2012.03.05 15:38
  • 그의 시는 이 시대를 무능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더군요. 이렇게 편한 세상에 살면서도 아무런 고민 없이 시간을 소일하며 살아가는 안일하고 나약한 모습을 마구 질책하는 듯하기도 하구요...
    확실히 시대가 어려울 수록 그 위대함은 더 빛나는 것 같아요...

    2012.03.05 11:37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그러게요. 더나은내일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왜 윤동주 시가 머리에 맴돌고 있는지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내 머리 속인데 왜 타인의 도움을?ㅋㅋ

      2012.03.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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