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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부학자

[도서] 해부학자

빌 헤이스 저/박중서 역/박경한 감수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완벽하게 현실적인 성격은 아니지만 비교적 현실적인 사고를 하는 편인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운명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 또는 소설을 극적으로 이끌기 위해 사용되는 하나의 모티프라고 생각할 뿐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또는 어떤 대상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고 생각해 왔다. 인연은 믿지만 운명이라는 표현은 항상 지나치게만 느껴져 왔다. 하지만 어쩌면 실제로 세상에는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것이 존재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에게 이런 생각의 변화를 가져온 책이 운명에 대해 언급되어도 개연성만 보장되면 수용하며 즐겨오던 문학 분야가 아닌 과학 관련 서적이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십진분류체계로 보면 500번대에 위치하는 그런 책에서 운명에 대한 생각에 변화를 가져왔다니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학술서로 보이는 책이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학술서는 아니었다. 뭐라고 규정하긴 어려운데 일종의 인물 탐구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자신의 경험에 대한 기록이 결합된 책이라고 할까?

 

 저자 빌 헤이스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의학 분야에 대한 꿈을 꾸게 했던 책 [그레이 해부학]의 저자인 헨리 그레이에 대한 글을 쓰고자 그에 대해 조사하게 된 것이 이 책의 첫 걸음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조사를 하다보니 헨리 그레이에 대해서는 성인기 이전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하고 유명한 인물이지만 이 인물 그 자체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기록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하지만 조사 과정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새로운 인물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를 [그레이 해부학]에 매료시킨 그림을 그린 장본인인 헨리 카터라는 화가 겸 의사의 존재였다.

 

 당연히 다음 수순은 그 인물에 대한 조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다행하게도 헨리 그레이와 달리 헨리 카터가 생전에 쓴 일기가 남아 있었기에 이 일기장을 통해 책을 탄생 과정과 두 저자가 만난 계기로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카터의 일기장은 자세하진 않았기에 많은 것을 담고 있진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정도로 충실한 기록의 흔적들이 남아있었기에 저자는 과거 두 헨리가 처음으로 만나서 책을 만들어가던 과정을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비록 온전한 기록이 아니기에 저자의 추측이 기반이 된 추적이지만 두 헨리가 어떤 성향의 인물이었는지 형상화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저자는 주로 일기장이 남아 있는 삽화가 헨리 카터의 삶을 추적하고 복원하게 된다. 글을 읽으며 저자가 조사 과정에서 이 헨리 카터라는 인물에 얼마나 빠져들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화가의 재능과 해부학자로서의 재능 양 쪽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가 얼마나 성실한 인물이었는지, 자신의 의학 화가로서의 재능을 자각한 시점이라든지 그가 얼마나 강박적일 정도로 성실하고자 한 인물이었지를 애정어린 문체로 복원시킨다.

 

 또한 그가 종교적인 면에서 어떤 고민을 겪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가감없는 태도로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는데 종교적 소수자로서 겪었을 그의 고뇌를 자신의 처지- 아무래도 동성애자인 듯 하다-에 비춰 공감하는 태도를 보이기에 해부학이라는 분야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시종일관 온기가 느껴진다. 본격적인 책의 탄생과정보다 카터의 고뇌와 방황을 다룰 때 글이 더 따뜻했다고 느낀 것은 나뿐이 아닐 듯 하다.

 

 이 저자의 놀라운 점은 이 책을 준비하며 실제로 해부학 실습에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해 해부학을 꾸준히 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며 참여한 실습이 마지막으로 참여한 의학생들과 함께한 해부학 실습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의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해 줄 수 있는 단계가 될 정도였으니 그의 열정과 성실성 역시 두 헨리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해부학 실습의 과정이 수필처럼 진행되는 동안 해부학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느꼈을 두려움과 흥분이 그들의 땀 냄새까지 맡아질 것처럼 느껴졌고 이런 실습과정이 헨리의 일생과 교차 편집되었기에 헨리 카터의 방황과 고민의 깊이에도 불구하고 책은 어둡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수필과 같은 글에는 헨리의 삶을 추적하는 과정도 함께 기술되어 있었는데 이 기술에는 그동안의 해부학 저서들에 대한 기술이 함께 되어 있기에 관련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듯 했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선물받았을 때 당황했다. 학창시절 생물을 좋아한 편이지만 정제되고 압축된 지식에 대한 접근이었고 그 후로는 간혹 관련 책을 볼 때는 있었지만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몸도 아프고 정신도 아픈데 골치 아플 과학책을 꼭 읽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해부학자에 대한 책이라니.... 해부학자라고 하면 검시관의 이미지가 연상되어 시체 옆에서도 햄버거를 먹을 수 있을 정도의 괴짜만이 연상되었기에 더더욱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유쾌하고 즐거웠다. 나에게 의학적인 탐구심이 조금만 있었다면 당장 [그레이 해부학]을 찾아보고 싶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만큼 이 책은 사람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해부학이라는 학문에 은연중에 가지고 있던 편견도 버리게 되었다. 해부학이라는 학문도 즐거울 수 있는 학문이었구나! 어쩌면 두 헨리의 만남이 운명적이듯 [그레이 해부학]과 저자의 만남이 운명적이듯 이 책과 나의 만남도 하나의 작은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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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 책을 읽으셨던 적지 않은 분들이 후하게 평을 내리시더군요... 급관심이...ㅋㅋㅋ
    음... 좀 더 작성되면 소상히 알 수 있겠지만 학술서처럼 보이면서도 조금도 딱딱하지 않은 이런 류의 책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건 분명 반가운 일일 듯합니다. 편안한 밤 되시구요... 즐겁고 행복한 연휴 보내시옵소서!!! *^^*

    2012.05.04 23:52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기대 안 하고 읽었는데 책이 참 편안하면서 재미있었어요. 급관심을 가지셔도 좋으실 듯 싶어요. ^^

      2012.05.07 14:46
  • 오율

    어릴적 드라마 종합병원을 보고 너무 의사가 되고 싶었때가 있었는데...^^
    이과쪽 머리도 아니면서 의사관련 드라마, 소설을 참 많이도 보면서 관심을 키웠던 때가 생각나요...
    최근엔 그레이 아나토미 미드를 재미있게 본 기억도 나구요.
    그래서 이 리뷰보니 너무 재미있을 것 같아요.
    이 책 찜...!!
    ㅎㅎ

    2012.05.05 18:04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전 막상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어요. 미드도 지치는 편이라 잘 안 보고요.
      그래도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찜 하셔도 후회 안 하실 듯.^^

      2012.05.07 14:50
  • 스타블로거 꿈에 날개를 달자

    이 책에 대한 리뷰가 좋더라구요.. 사실 저 같은 사람에게 해부학은... 너무 멀다라는 생각을 하잖아요... 하지만 이렇게 책을 읽고 나면 또 다른 생각을 할것 같아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생면을 연장한 것도 맞잖아요... 딱딱할 수도 있지만... 왠지 관심이 가네요.. 참... 몸은 이제 좀 괜찮아요?

    2012.05.05 21:44 댓글쓰기
    • 카스트로 폴로스

      전 해부학이 참 징그럽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하나의 미학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몸은... 감기 다시 걸려서 코 맹맹이 소리로 말하고 있어요. ^^;

      2012.05.07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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