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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북부 쪽 여행의 끝은 언제나 파주였다.그러다 최근 조금더 멀리 멀리 가게 되였고,드디여(?) 철원까지 가게 되었다.올해는 특히 평화가 화두였던 한해였기에 그랬을수도 있겠고.그렇게 무작정 철원으로 계획없이 가보게 되었다.목적지는 오로지 하나였다. 철원 노동당사!

 

 

너무 느지막하게 출발한 것은 아닐까 걱정했었는데,뉘엿뉘엿 지는 햇살 덕분에,노동당사의 스산함이 더 강렬하게 느껴지게 되었다.총알이 박힌 벽들을 보고 있노라니..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가...무심히 찍은 벽에 박힌 총알이 절규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 마저 인다.그런데 철원을 다시 와 보고 싶은 생각은 노동당사를 보고 난 이후였다.그 유명한 도피안사..가 있는 곳이 여기였다니,그런데 시간도 그렇고,너무 추워서 메모만 하고 철원막국수(사리추가 해서 먹을 만큼 맛났다^^) 를 먹으러 가면서 소이산 생태숲길 걷고,도피안사도 만나러 다시 와야 겠다고 생각했다.그러고 나니 철원에 관한 책을 찾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나의문화유산답사기>2 편에 철원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이렇게 반가울 수가...그런데 시작부터 전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철원에 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지만,강에 관한 이야기는 읽는 것으로 마무리 하기에는 너무너무 아쉬워서...^^

 

 

"철원의 철원다운 모습을 보는 것은 아무래도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폐허가 된 철원 구시가지에는 마을 한쪽에 다 허물어져 뼈대만 남은 철원군노동당 당사와 감리교 교회터가 있단다."/286쪽  (폐노동당사에 관한 이야기는 생각했던 만큼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어쩌면 열마디 말보다 현장에서 직접 봐야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든다.총알이 박힌 상처들...아니 고통의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기분이란...)

 

폐노동당사를 나와 철원막구수집으로 향하던 길 선명하게 들어왔던 이정표 '도피안사' 그러나 겨울저녁의 추위와 시간은 도피안사와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았다. 덕분에 다시 철원을 찾을 핑계를 만들어 놓았다.그렇게 도피안사를 책으로 먼저 만나게 되었다는~^^

"철원이 내세울 미술사적 유물의 진수는 뭐니뭐니 해도 도피안사이다.(...)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절집이라는 이 아름다운 고찰은,그러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민통선 안쪽 군부대 속에 처량히 남아 있었다.

(...)피안과도 인연이 없고 찾아오는 과정이 결코 즐거울 리 없으면서도 도피안사를 여러 차례 찾아간 까닭은 저 유명한 철조 비로자나불상(국보제63호)이 나를 부르기 때문이었다./289쪽

 

"도피안사의 앞마당의 삼층석탑(보물223호) 또한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감은사탑,석가탑 이후 통일신라의 석탑은 모두 이성기단에 삼층석탑을 하나의 전형으로 삼았는데,여기서는 기단부를 팔각받침에 연화대좌로 대신하여 마치 불상의 좌대 위에 석탑이 얹힌 것처럼 세워졌다.여기서는 석탑이라는 조형의 아름다움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정형을 파괴하려고 했던 그 조형의지가 주목되는 것이다.도전과 파괴의 힘! 그것도 도피안사 철불과 석탑의 조형목표였던 것이다"/294~295쪽

 

답사여정은 (삼팔휴게소-삼부연폭포-승일교-고석정-직탕폭포-도피안사-노동당사) 일정으로 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나의 문화유산답사기>1편이 나왔을 때 책을 챙겨서 여정을 떠났던 때도 겨울이었다.지인과 서울에서 밤기차를 타고 목포에서 내려 또 버스를 기다리고,다산초당이랑 대흥사 등등 다녔던...철원 답사기를 따라가면서,지도를 보고 있자니 오래전 그날이 생각나기도 했고,다시 책을 벗삼아 답사를  싶어졌다.물론 예전처럼 꽉 찬 일정대로 움직이진 않을 터.철원은 따뜻해지면 다시 와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삼부연폭포의 얼음위를...정선선생에 관한 글이 또 유혹을 한다.개정판 역시 2010년이라,폐노동당사를 가는 길은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편하지는 않았다.도피안사는  어떨지 모르겠지만..서울쪽에서 오는 길은 삼부연폭포가 가깝고,나처럼 경기북부쪽과 가까(?)운 곳에 사는 이에겐 도피안사가 그래도 조금 가까운 편이긴 하다. 그래도 철원은..여전히 가까운 듯 먼곳임에는 분명하다^^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빌려 인생을 노래하고 역사를 이야기하였다.이기영의<두만강> 한설야의<대동강>조명희의<낙동강>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

한강은 남북으로 갈라 신경림은<남한강> 정태춘은<북한강에서>를 노래했고 섬진강의 상류는 김용택이 즐겨 시로 읊었는데 하류는 박경리의<토지>가 휘감고 돌아갔다.별로 길지도 않은 금강은 사연이 길어 신동엽의<금강>에서 채만식의<탁류>까지 나왔는데 영산강은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 받아갔고 하근찬의 소설에서 싱싱하던 금호강은 어엿한 임자를 못 만난 채 페수로 썩어간단다.

<청천강>은 이용악의 시에서 해맑은 빛을 발하였건만 황강은 천금성이<황강에서 북악까지>로 엮어가는 바람에 전라도말로 "배려버렸고" <백마강>은 흘러간 옛노래가 뽕작으로 흘러버렸으니 임자를 잘 만나고 못 만남에 팔자가 바뀐것은 강도 마찬가지였다.

<임진강>을 쓴 김낙중은 반공사범이  되어 영어의 몸이 되었건만 <예성강>은 반공 다큐멘터리 드라마의 제목이 되었으니 강에 얽힌 분단의 상처는 그렇게 남았다.

(....)

그런 중 이상하게도 정말로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임자가 나설 법도 한 강 하나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것은 한탄강이다.

한탄강은 금강산 아래쪽 추기령에서 발원하여 평강,철원,연천을 지나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총길이 136킬로미터의 제법 긴 강이다.본래 이름은 '한여울'즉 큰 여울이라는 뜻을 지녔는데 이것을 한자어로 바꾸면서 은하수처럼 길고 넓다고 하여 은하수 한자와 절벽을 휘감고 돈다고 하여 여울 탄(灘)자를 붙여 한탄강이라 부르게 됐다.

이 한탄강은 궁예가 철원땅에 후고구려의 도읍을 삼으면서 제 빛을 발하는가 싶더니 후삼국의 다툼 속에서 국토의 3분의 2를 장악하던 그가 부하 왕건에게 쫓기어 이 강을 건너면서 눈물어린 한탄을 했다고 한탄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272~273

 

"한탄강은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철원평야를 휘감아돌다 연천군 전곡리에서 임진강과 합수된다.철원은 한탄강과 함께 비운의 역사를 갖고 있다. 해방되도 38선이 그어질 때 북한땅이었지만 6.25동란 이후 휴전선은  철원군을 남북으로 두 동강 내버렸다.그나마도 반쪽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으로 우리의 발이 닿지 않는다.그래서 철원에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철원이라면 휴전선이 있는 곳 철의 삼각지의 현장 제2땅굴 견학장소 정도로만 생각한다."/275~276쪽

 

"신철원읍 지포리에서는 울음산 한쪽 자락에 있는 삼부연폭포까지 차로 10분이면 갈 수 있다. 여기는 조선후기 노론세력의 종갓집이던 안동 김씨 가문에서 숙종 때 대들보 역활을 했던 삼연 김창흡의 은거지로도 이름높다. 한겨울 삼부연폭포와 연못이 꽝꽝 얼어붙을 때면 내 발을 오래도록 여기에 묶어놓는 장관이 펼쳐진다.삼부연폭포가 내게 흥미로운 것은 삼연의 비호와 후원 속에 화가로 성장했던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들러 그린 바 있는 진경산수의 한 현장이기 때문이다."/279~280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

유홍준 저
창비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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