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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도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요한볼프강폰 괴테 저/박찬기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고전독서회 3월 모임에서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토론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처음 읽었습니다. 젊었을 적에 읽어보았더라면 세월 따라 생각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무명작가 괴테를 유명하게 만든 이 작품의 원제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입니다. 원제목에 있는 die Leiden은 das Leid의 복수형으로 슬픔이라는 의미보다는 고통, 괴로움, 고뇌에 더 가까운 뜻을 담고 있다고 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번역소개된 것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을유문화사와 창작과비평사에서는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했습니다.

 

사회적 유명인사의 죽음, 특히 자살하는 경우에 뒤따라 자살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경우 베르테르 효과라고 하는데, 이 작품이 발표된 뒤 2,000여명의 유럽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모방하여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베츨라어에 있는 고등법원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던 23살 때 샤를로테 부프를 만나 연정을 품었지만, 요한 케스트러와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포기한 바 있고, 당시 유부녀의 헤르트 부인을 사랑했던 카를 예루잘렘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가 자살했다는 소식 등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이 작품에는 그가 숱하게 염문을 뿌렸던 여성들과의 연애담이 녹아있다고 합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를 읽고 토론하기로 한 주제는 모두 네 개였는데, 답을 찾기기 쉽지 않았습니다.

 

1. 극 중 베르테르는 호메로스의 작품을 매우 좋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극 초반에 베르테르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자장가인데 그것을 호메로스에서 찾았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베르테르가 호메로스에서 찾은 자장가는 무엇일까요?

이야기 초반 베르테르는 호메로스 작품의 애독자임을 곳곳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5월 13일자로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지도나 격려를 받는다든지 선동을 당하는 따위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내 가슴은 스스로도 충분히 끓어오르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그것을 가라앉혀 주는 자장가다. 그것은 내가 애독하는 호메로스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끓어오르는 피를 자장가로 달랬는지 모른다.(16쪽)”는 대목이 있습니다. 3번째 주제인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운동과 연결이 되는 대목으로 생각합니다.

 

주제를 읽고 떠올린 것은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세이런의 유혹적인 노래였습니다만, 자장가와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리망을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그는 부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저 멀리 바다에서 거품을 일으키는 파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사나운 바람에게 애통한 자장가를 불러주던, 허리가 굽은 노인을 보았다. 무슨 말인지 들리지도 않았지만 들을 필요도 없었으니, 모든 인간의 쓰라린 고통이 그의 목구멍에서 솟아올라 절망 속으로 흩어진다는 사실을 고독한 자는 잘 알았다.”

 

하지만 주제에서 말하는 자장가를 <오뒷세이아>가 아니라 <일리아스>를 인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전독서회에서도 읽었습니다만, <일리아스>는 아가멤논의 갑질에 진절머리가 난 아킬레스가 전쟁터에서 출전을 거부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베르테르는 트로이 원정대의 지휘관인 아가멤논의 일방적인 처사에 반항하는 아킬레스의 모습에서 당대 독일 사회에서 전횡을 일삼는 귀족들의 행태에 저항할 이유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자는 베르테르의 피를 끓게 하는 요소가 로테에 대한 미칠 듯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도 합니다만, 빌헬름에게 보낸 편지는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나기 전에 보낸 것이므로 옳은 설명이라고 할 수 없겠습니다.

 

2. 알베르트는 자살은 의지박약의 결과로 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하는 반면, 베르테르는 사람이 강하다 약하다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딜 수 있는 가에 대한 문제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을 비겁자라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주장에 동의하시나요?

빌헬름에게 보낸 8월 12일자의 편지(76-78쪽)에 나오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여행을 앞둔 베르테르가 알베르트에게 작별을 고하려 찾아갔던 참에 총알을 빼놓은 장식용으로 걸어둔 총을 발견하고 빌려달라고 합니다. 알베르트는 총알을 장전해두지 않은 이유는 하인에게 손질을 하라고 시켰더니 실수로 총을 발사하여 하녀가 부상을 입은 사건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알베르트의 신중론에 반감이 들었던 베르테르가 발작적으로 오른쪽 눈 위에 총구를 대어보았고, 알베르트가 “바보같이!”라고 소리치며 권총을 잡아챕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요?”라는 알베르트의 말에 “총알이 들어있지 않다면서요”라고 대꾸하는 베르테르에게 알베르트는 “인간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을 만큼 어리석을 수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나는 아주 불쾌해요.”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베르테르는 “당신네 같은 인간은”하고 소리치면서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것은 좋다, 그것을 나쁘다, 등등 잘라서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모양”이라면서 “이런 경우 어떤 사람이 강하다, 약하다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일이건 육체적인 일이건 간에 자기의 고통의 한도를 견디어낼 수 있는가 없는가가 문제지요. 따라서 나는 자기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사람을 비겁하다고 부르는 것은 마치 악성 열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일이라 생각해요”라고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알베르트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신이 강하다, 약하다의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는 용기와 강단이 있으면 자신에게 닥친 고통을 이겨내지 못할 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안락사의 문제에 오랫동안 천착해왔습니다. 치유 불가능한 질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의 생명을 인위적으로 단축해주는 적극적인 안락사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이유 없이 생명을 연장해주는 시술을 해주는 것도 적절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다만 고통을 완화해주는 요법을 시행하면서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는 소극적 안락사는 찬성합니다.

 

3. 흔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질풍노도 시기를 묘사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간주되는데요, 작품 중에서 질풍노도 시기의 특성으로 볼 수 있는 베르테르의 행동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흔히 청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합니다. 앞서 조금 말씀드렸습니다만, 여기에서 말하는 질풍노도, 독일어로는 슈투름 운트 드랑(Strum und Dran)운동은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운동을 이야기합니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이어지는 1765년경부터 1786년 경 사이의 약 20년 사이에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문학과 연극 등에서 유행했던 사조입니다. 위키백과를 보면 사상적으로는 루소의 자연사상이나 시페네르의 경건주의, 희곡에서는 셰익스피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연적 개성을 존중하고 고전극의 특징적인 연극이론인 삼단일 법칙을 부정했습니다. 부알로(Boileau)의 <풍자시의 한 대목에서 설명하는 삼단일치는 이렇습니다. “한 장소에서, 하루 중에 오직 하나, 완성된 일이 마지막까지 무대를 충만시킬 수 있도록 하라.”

 

슈투름 운트 드랑(Strum und Dran)은 극작가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클링거가 쓴 희곡의 제목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친 청년의 열광과 파괴 그리고 파탄으로 마무리되는 경향입니다.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유행했지만 후대의 문학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합니다. 대표적 희곡으로는 괴테의 초기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Gotz von Berlic­hingen; 1773)> 실러의 <음모와 사랑>, <군도(群盜)>, 클링거의 <쌍둥이>, 렌츠의 <군인들>과 <가정교사>를 비롯하여 이론적 저작인 <연극각서>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향한 연정과 이를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모습, 베르테르에 대하여 감정적으로는 사랑을 느끼고 있지만, 이성적으로는 약혼자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받아들이지 못하는 로테에게 실망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자기파괴적인 행위가 질풍노도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서민출신으로 법무관으로 일하면서도 상관인 공사의 부당한 처사에 반발하는 모습이라거나 자신을 배척하는 귀족사회에 저항하여 법무관직을 사퇴하고 로테에게 돌아가는 적극적인 행보 역시 질풍노도운동의 대표적 행동이라고 하겠습니다.

 

4.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무엇이 불행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과연 불변의 법칙일까?” 라는 문장이 나오는 데, 혹시 이러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이 대목을 찾으려고 책장을 몇 차례나 다시 뒤적여야 했습니다. 권총을 두고 알베르트와 격론을 벌인 사건이 있고서 얼마 뒤인 8월 18일자의 편지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불행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과연 변할 수 없는 것일까?(85쪽)”라는 대목으로 시작합니다. 이 문장은 진리일 수도 있습니다. 행복에 취해서 안주하게 되면 불행의 서막을 열리는 것입니다. 반면 불행을 가져왔다고 생각했던 것이 알고 보니 행복한 결말로 안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불행이냐 행복이냐는 마음먹기 달린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떻거나 세상에 만고불변의 법칙은 없는 법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을 받아먹는데 안주하지 않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보면 행복을 오래 이어갈 수도 있습니다.

 

행복에 안주하다가 불행한 사태를 맞은 경우가 없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행복과 불행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어떤 경우를 꼽아야 할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분명 없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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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추억책방

    눈초님. 고전 독서회를 하고 계시는군요. 토론한 주제를 리뷰에 올려주셔서 저도 독서회에 참여한 기분이 듭니다. 학창시절 이 책 읽다가 중도에 포기했는데...
    책장에 먼지만 쌓여있는 이 책을 꺼내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집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2022.07.06 21:23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눈초

      최근에 독서회원을 조금 늘려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답니다.

      2022.07.06 22:51
  • 스타블로거 달밤텔러

    눈초님이 올려주신 고전독서회 모임 후기 잘 읽었습니다.자세하고 꼼꼼하게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
    저도 고전문학에 관심이 많고 이런 독서회에 참여하고 싶은데 어떻게 참여할수 있을까요? 모임에서 토론 주제에 대해 심도있게 토론한 점이 너무 마음에 드네요 ~^^

    2022.07.07 07:33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눈초

      독서회 회원님들께 달밤텔러님의 뜻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쪽지로 간략한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2022.07.0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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