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습니다. 4부 12편에 1653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기 때문에 10월과 11월에 나누어 읽기로 하였습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책읽기를 제안하신 헤라스님으로부터 6가지 문제를 받았습니다. 고전독서회에서 나왔던 주제 가운데 가장 심오한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1. <믿음이 약한 부인>에서 부인은 신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무신론자입니까? 유신론자입니까. 그렇게 된 특별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내세에 대해 의견을 말해주세요.
특히 신과 인간의 존재 이유에 관한 내용은 고 이병철 회장님이 절두산 성당의 박희봉 신부님께 드렸던 ‘존재의 진리에 관한 24가지 질문’과 맥을 같이 하는 것 같습니다. 이병철 회장님의 질문에 대하여 철학자 김용규교수가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24>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그리고 차동엽신부님이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으로 질문에 대하여 답을 정리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이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인 것을 보면 이병철 회장님 역시 신의 존재가 궁금했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존재는 이성적으로 증명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는 믿음에 달린 것이라는 입장으로 알고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진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것은 증명된 진리가 아니라 증명이 유보되어 아직은 진리라 할 수 없는 것이라 보는 것이 옳겠습니다. 내세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2. 이반은 지상에 사랑이 존재하고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자연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들이 자신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혼의 불멸이 없다면 선행도 없고, 따라서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인간의 선한 행동 또는 남을 위한 실천적 사랑은 어디에서 나온다고 믿나요?
2세기 무렵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기독교의 첫 번째 이단 그노시스파는 물질세계는 허구이며 정신세계야말로 신이 창조한 올바른 세계라고 믿었습니다. 불완전한 육체로부터 영혼을 분리해내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영혼은 불멸하므로 영생이 가능하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불멸하는 영혼이 평안하기 위하여 현세에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반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교의 문제점으로 “‘신’ ‘영혼’ ‘자아’ ‘정신’ ‘자유의지’ 등과 같은 존재하지도 않은 것을 정말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예수의 존재는 인정하지만, 예수의 가르침 중에는 ‘죄와 벌’ ‘보상’의 개념, 즉 신과 인간의 관계를 멀어지게 할 만한 것들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죽은 것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실천의 철학을 가르친 셈인데, 정작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집단선택설에 인용하였습니다. ‘개체의 이타적 희생도 알고 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매트 리들리 역시 <이타적 유전자>에서 흡혈박쥐들이 사냥해온 피를 서로 나누는 사례들을 인용하여, 이타적 행위가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3. 이반은 <대심문관>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요? 그리고 대심문관과 예수의 의견 차이는 무엇인가요?
15세기 스페인에서 90살의 추기경이 종교재판의 대심문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가 재림하자 대중들이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끌려 예수를 따라가고 예수는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에게 축복을 내렸는데 그의 몸은 물론 옷자락을 스치기만 해도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힘이 솟아났다고 합니다. 대심문관이 그 광경을 보고 체포하여 ‘네가 예수냐?’하고 물었습니다. 예수가 대답이 없자 그는 네가 무슨 권리로 우리를 방해하러 왔느냐. 네가 진짜 예수건 아니건 간에 내일 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에 처할 것이라고 합니다.
대심문관은 자신이 건설한 지상낙원의 실체를 털어놓는데, 인간이라는 나약한 존재는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자유를 반납 받고 대신 빵을 제공하여 온순한 양떼로 길들였다는 것입니다. 즉 악마가 예수를 유혹하기 위하여 제시했던 신비, 기적, 권위 등을 내걸어 사람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침묵하는 가운데 입맞춤을 통하여 가르침을 전합니다. 모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신적 차원에서의 화해의 뜻을 전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는 신을 믿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4. 조시마 장로는 <러시아의 수도사와 그 가능한 의의에 관하여>에서 현재의 자유는 과학의 힘으로 오직 감각에 종속된 물질적인 욕구만을 추구하면서 노예적인 굴종과 자살뿐이라고 주장합니다. 반면에 수도사는 복종, 굴욕, 기도를 통해 참되고 정신적인 진짜 자유를 얻는다고 합니다. 현재에 사는 여러분은 진정한 자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조시마 장로의 생각이라고 설명하는 자유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인식은 감각적인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스스로의 영혼까지도 팔아치울 정도의 굴종까지도 바칠 수 있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수도사(혹은 그리스도교인도 포함하겠지요)는 복종과 굴욕, 기도를 통하여 참되고 정신적인 자유를 얻는다고 하는 것도 결국은 정신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복종과 굴욕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진정한 자유라 함은 신체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누군가에 복종하고, 굴욕까지 바쳐야 하는 관계는 아닐 듯합니다.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자신의 삶의 방식을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닐까요?
5. (Page566) 인간존재의 비밀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에 있으니까.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가에 대한 확고한 개념이 없다면 인간은 설령 주위에 빵 천지라 할지라도 스스로 박멸할 것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요? 그렇게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젊어서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돌연변이에 의하여 획기적으로 변화된 능력을 얻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무언가를 조금씩 조금씩 쌓여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앞서 말씀드린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대의 뒷받침으로 선대보다 조금 나은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저 역시 후대의 삶이 저보다는 나을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는 것으로 제가 할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 가정이 나아가 우리 나라가 그리고 세계가 보다 나은 내일이 되지 않을까요?
6. 책을 읽고 난 소감을 간단히 말해보세요(시간이 되면 토의)
밀란 쿤데라는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각색한 희곡 <자크와 그의 주인>의 모두에 적은 ‘변주서설’에서 저술에 관한 이야기를 적었습니다. 소련이 그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였을 때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희곡으로 각색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각색작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극단적인 행위와 어두운 깊이, 공격적인 감성들로 이루어진 그 세계가 혐오스러웠다”라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에 대하여 혐오감마저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 혐오감에 대한 객관적 이유를 내세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그의 책이 풍기는 분위기, 즉 모든 것이 감정이 되는 세계, 다시 말해 감정이 가치와 진리의 수준으로 승격된 세계라는 점’이 거슬렸다고 합니다. 저 역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어가면서 묘한 느낌이 남았는데, 쿤데라의 설명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