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사람들 중 몇몇은 새나라를 꿈꿨으나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이름만 존재하며 사라져 갔다. 이정의 무릎과 얼굴과 배가 차례차례 늪에 처박혔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이렇게 첫 장면에서 강렬하게 시작하는 이정의 독백은, 크게 성공하여 제물포도 당당하게 돌아온 그의 모습이 아닌 그가 마지막에 무엇을 그리워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알려주는 것이었을 뿐이다. 무엇을 기대했는가. 제물포에서 멕시코로 떠난 1033명의 삶을 진정 나는 그들이 성공하여 당당하게 조국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었던가.
새로운 터전으로의 무모한 걸음을 시작하였으나 끝내 조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종도, 그는 아내와 아들 이진우, 딸 이연수를 낯선 나라로 이끌었으나 죽는 순간까지 조선에 있는 듯 시종일관 양반으로 살다 양반으로 죽었다. 죽는 날까지 조선을 놓치 못했던 이종도에게 삶은 가혹했다. 1033명이 모두 조선에 있었다면 역사속에서 사라졌겠지. 물론 다른 나라의 혁명에 몸을 담았던 이들에게도 역사는 냉혹했고 그저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사라져 버리게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이야기들 중 이정과 이연수, 권용준, 박수무당, 박광수, 조장윤 등의 이야기는 이 책의 중심을 이룬다. 여러 농장으로 흩어졌으나 개개인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멕시코로 향하는 배안에서조차 살아온 습관, 조선의 것들을 버리지 못한 그들에게 낯선 땅에서 조선에서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으나 비천한 신분의 이정이 양반인 이연수와 인연을 맺어가는 것이 이연수에겐 조선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임에도 이곳에서는 가능하게 했다. 무엇이 이 두 사람을 서로에게 이끌었을까. 이연수에겐 왜 이정이어야 했을까.
가난한 농민들, 군인들은 돈을 많이 벌어 조선으로 돌아와 땅을 사고 싶어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들은 땅을 사고 가족을 만들고 싶어했다. 가족을 놔두고 이곳에 온 이들에게 조선은 꼭 돌아가야 할 곳이다. 땅이 없어 이곳으로 떠나야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선으로 돌아가 땅을 사는 것은 희망이고 꿈이었다. 제물포에서 배가 출항할 때 그들은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겼으나 에네켄 농장에서 에네켄 줄기의 가시에 긁히고 채찍에 맞으며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때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가자는, 돌아가고 싶다는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1033명의 마지막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들이 기억속에 담았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조선이었을까. 조선에서 살아온 시간들? 아마도 꿈에서도 그리웠을 파란 하늘과 논과 밭이었겠지. 제물포를 벗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것들을 죽는 순간에는 눈 앞에 그린 듯이 선명하게 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