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인지 아닌지 희미한 기억이 있다. 첫 번째 만남이었을 것이다. 나의 아빠 또래의 남성이었고 내 또래의 딸이 있다고 했다. 나에게 좋은 제의를 하셨고, 감사하지만 거절하는 의사를 표했으며, 서로에게 호감을 지니고 저녁을 먹는 자리였다. 말 그대로 '호감好感'일 뿐 상식에 기반할 때 성적인 감정이 아니고 여지도 없었건만 나는 의식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많이 하고 많이 여쭸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남자친구 이야기도 중간중간 언급했다. 밥을 거하게 먹었으므로 근처 공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삼풍백화점 참사 추모탑에서 잠시 머물렀고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 대해 대화했다. 하루를 마무리할 시점이 다가오자 그분은 악수를 청하셨다. 끝까지 존댓말을 쓰시는 분이었다. 나는 저녁 내내 느끼던 긴장을 그제야 놓으며 기꺼이 악수에 응했다.
그리고 그대로 걸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나는 분명 악수를 했는데, 손을 놓지 않았고, 그대로 걷게 된 것이다. 그렇게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이 나올 때까지 걸었다. 이거 뭐지? 성추행인가? 근데 이 사람이 나를 껴안거나 만진 것도 아닌데 성추행인가? 나는 왜 이대로 걷고 있지? 왜 나는 거절하거나 소리 지르지 않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생각이 흘렀지만 그분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셨고 현실의 나는 맞장구까지 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손을 뺄 수 있지? 왜 나는 웃고 있지? 이 상황은 뭐지? 심장이 쿵쾅거리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놓아져있었다. 내가 자의적으로 놓은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놓아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친구들에게 전화하여 "내가 이상한 거야?" 묻지 않았다면 그 밤은 꿈인지 현실인지 혼미하게 남았을 것이다. ‘설마 그랬겠어’라는 생각에 기어코 착각으로 매듭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나는 버스에 타자마자 친구들에게 전화했고, 그럼에도 그 남성을 욕하기보다는, 이게 진짜 이상한 일이 맞는지, 내가 잘못한 건 아닌지, 나는 나름대로 선을 그었지만 혹시 내가 여지를 준 건 아닌지 묻는 데 급급했다.
더 웃긴 건 그다음에 한 번 더 만났다는 것이다. 연락이 왔고, 드문드문 답장을 했고, 만나자고 했고, 거절을 했고, 또다시 만나자고 했고, 거절을 했고, 또다시 만나자는 말에, 거절을 세 번씩이나 하는 게 부담스러워져서, 만날 약속을 잡고 말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어느 순간 약자가 되어 있었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했다.
애나 번스의 『밀크맨』에선 열여덟 살 소녀에게 갑자기 ‘밀크맨’이라 불리는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차를 태워줄까?"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는 달리는 소녀의 곁에서 같이 뛰었을 뿐이다. 그는 소녀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소녀는 대처할 방법을 모르고, 이상한 소문이 나고, 점점 사회에서 고립된다.
'이때에도 밀크맨이 무례하게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무례하게 밀치고 달려나갈 수는 없었다.(p. 21)'
'그게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튀김 가게는 사실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확신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나도 그게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p. 341)',
'나는 또다시 주의를 듣고 다른 사람이 오해한 것을 내가 반박하고 해명하고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p. 402)'
나는 소녀의 혼란한 감정을 따라 읽으며 비로소 부끄러워하던 기억을 직시하게 되었다. 긴 호흡의 두꺼운 소설은 읽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의 감정에 대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내가 느낀 나의 감정이건만 나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며 이야기했다. 두 번째 만남 내내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는 않았다. 내가 대꾸하기를 바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대꾸할 말도 없었지만. 나는 계속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에 골몰하고 있었다. 또 왜 마치 자기가 나를 아는 듯,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인 듯이 행동하는 거지? 모르는 사이인데? 나는 저 사람이 옆에 있는 게 싫은데 왜 저 사람은 내가 자기가 옆에 있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 안 하지? 왜 나는 달리기를 멈추고 저리 가라고 말하지 않는 거지? 등의 의문도 있었다. 다만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거지?’를 제외한 나머지 의문들은 나중에야 생각났다. 한 시간 뒤에 생각난 것도 아니고 스무해 뒤에 생각났다. 그때, 열여덟 살 때, 나는 일촉즉발인 사회에서 자랐고 이곳에서는 신체 폭력이 없는 한, 명백한 언어적 모욕이 가해지지 않는 한, 눈앞에서 조롱당하지 않는 한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보는 게 기본 원칙이었으니, 그러니 일어나지 않은 일에 피해를 당했다고 할 수도 없었다.
- 애나 번스, 『밀크맨』 中
며칠 뒤 어떤 모임이 끝나고 또래의 남자가 커피 한 잔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 선량한 문자를 받고 나는 공포를 느꼈다. 이 사람은 도대체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이 사람도 내 손을 잡아버리는 게 아닐까? 근데 내가 뭐라고 이런 오만한 걱정을 하지? 이성은 ‘모든 남자를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지 마라’라고 외쳤다. 그러나 나의 감정은 이성보다 더 즉각적이었다. 앞에선 웃고 있지만 실은 웃어도 될까 걱정하는 중이었다.
『나쁜 페미니스트』 책으로 다른 독서모임과 열몇 명이 콜라보 모임을 했을 때였다. 한 여성분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말 하면 놀라실 수도 있지만, 저는 사실 성추행 경험이 있어요.”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여성들이 증언하듯, 위로하듯 입을 열었다. “저도 있어요.” “저도요.” “저도예요.” “저도요.” 『밀크맨』은 그 모든 여성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부디 스스로의 감정과 기억에 의심을 가지지 않으셨으면 한다. 나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