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렌티큘러 표지 한정판!
꿈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기억』을 읽으면서였다. 정확히는 『기억 1』 148쪽을 읽은 직후다.
고대 그리스에서 망각의 강 레테의 상징이 뱀이었던 것은 이 동물이 놀라운 허물벗기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 뱀은 이전에 껍질을 벗으면 새로운 껍질이 나타난다.
허물벗기가 일어나는 동안 뱀은 앞을 보지 못한다. 이전의 껍질을 완전히 벗어 버려야 뱀의 탈피가 완료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 뇌에서는 자는 동안 일종의 선별 과정이 일어난다. 전날의 기억은 잊어야 하는 것과 기억해야 하는 것, 이렇게 둘로 나뉜다. 역설적이게도 망각 현상, 즉 지난 껍데기를 버리는 것은 원활한 뇌의 작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낮 동안 벌어진 일을 전부 기억해야 한다면 우리 뇌는 금세 포화 상태가 될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하느라 지치게 되면 생각을 하는 것도 새로운 기억을 생성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것이다.
뇌의 선별 과정에서 실수가 생겨 걸러지지 못했지만 무의식에서 저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억의 파편들을 다시 끌어모으는 것이 꿈이 하는 역할이다.
- 『기억 1』 p. 148
나의 무의식에서 저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기억의 파편이 무엇인지, 그 끌어모은 파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자기 전에 노트와 펜을 곁에 둔다. 꿈을 기억하겠다고 다짐하며 잠이 든다. 깨자마자 꿈속 내용과 감정을 되새기며 빠르게 적는다. 샤워를 하고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곤 나의 무의식이 저장한 메시지를 해독했다. 꿈은 이야기꾼이었다. 흔적과 걱정을 조합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동자에 고름이 났던 꿈은 최근 온라인 개학으로 급증한 컴퓨터 사용 시간 때문에 안구가 뻑뻑했던 것과 연결되었다. 타락한 여자와 윤리적인 여자를 구분하는 연설에 시달린 꿈은 어느 밤 살해된 여성에 대한 뉴스와 연결되었다. 어느 날은 '내가 자는 동안에도 뇌가 쉬지 못한 것 같다'라고 코멘트를 달았고 어느 날은 '오늘은 어떤 꿈을 만날지 설렌다'라고 덧붙였다. 점점 더 무의식의 세계가 흥미로워졌다.
『기억』은 바로 그 무의식이 단지 하루의 파편, 삶의 조각이 아니라 전생까지 반영하는 게 아닐까라는 작가의 상상력이 발휘된 소설이다. 주인공인 르네는 최면술사 오팔을 만난다. 편안한 의자에 앉는다. 계단을 내려간다. 두꺼운 방화문에 보인다. 육중한 자물쇠가 달려 있다. 자물쇠를 따고 들어간다. 가장 가까이에 111이라는 숫자가 보인다. 나는 112번째 문에서 나온 것이며 즉 112번째 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가보고 싶은 전생을 이야기한다. '가장 영웅적인 삶을 살았던 때가 궁금해요.' 하나의 문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그 문을 연다. 그리고 전생의 내가 눈앞에 있다.
그 전생과의 만남을 통해 르네는 자신의 첫 번째 생이 아틀란티스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평화로운 문명을 이룬 아틀란티스인을 통해 초연함을 배운다.
살아 있는 한, 우리에게 닥치는 불행은 그저 삶의 항해에서 만나는 잔파도에 불과하다. 그게 없다면 얼마나 지루할까.(『기억 1』 p. 146) 세상에 하늘이 무너질 일 같은 건 없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해.(『기억 1』 p. 154) 나는 살아 있다, 고로 행동한다. 나머지는 부차적이다.(『기억 1』 p. 160) <위험의 원천은 바로 두려움이다>, <우리한테 일어나는 일은 모두 우리의 행복을 위한 것이다>(『기억 1』 p. 296)
아틀란티스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역사가 계속된다면 그 긴긴 시간을 살아내는 영혼에게 현재란 얼마나 보자기만한가! 그뿐 아니다. 1번째 삶이 원했던 환경이 2번째 삶에서 이루어지고, 2번째 삶이 원했던 모험이 3번째 삶에서 이루어졌으며, 111번째 삶이 원했던 바람이 이루어진 게 바로 112번째 생, 르네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읊조린다. <나는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기억 2』 p. 348)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내가 책 읽는 기쁨을 느낀 세 번째 작가다. 첫 번째 작가는 『해리포터』 시리즈의 조앤 K. 롤링이고 두 번째 작가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의 김진명 작가다. 중학생 시절, 이 세 명의 작가들 덕분에 밤을 새우며 책이란 걸 읽었다. 취미에 독서를 적기 시작했고 매주 도서관을 다녔으며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고 한국 소설에 이어 고전을 독파해나갔다. 그 일련의 파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이 반가웠고 옮긴이의 말에 적힌 문장은 더욱 반가웠다.
첫 작품 『개미』부터 신작 『기억』에 이르기까지 확장과 진화를 거쳐 온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은 한결같다. 순환적 세계관과 타자적 관점, 그리고 인간에 대한 낙관과 유머.
- 『개미2』 p. 397 옮긴이의 말 中
중학생이던 내가 서른이 될 때까지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낙관과 유머를 말하고 있었다.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나의 생이,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작가의 <나는 우연히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라는 상상을 통해 오히려 뻗어나갈 힘을 얻었다.
여전히 꿈일기를 쓰고 있다. 나의 삶이, 내 삶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내가 꾸는 꿈들이 조금 더 낙관과 유머를 선택하기를 바란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