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신학은 분명히 인간의 작업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져야만 한다. ”
카우프만은 신앙과 신학을 구분함으로써 신학적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일치점마저 가정할 수 없게 된 종교 다원주의 시대를 직면하며 새로운 구성신학적 컨셉을 제안한다.
구성신학이란 ‘예비적인 것으로부터 궁극적인 것으로, 즉 피조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방법론으로서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신학이야말로 신학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신학으로, 신학-하기에 앞서 프롤레고메나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위로부터의 신학, 즉 하나님의 계시에 관한 주장은 신학 작업의 결론이 되는 것이지 전제가 아니라고 피력하며, 이전의 중세적 혹은 근대적 방식의 신학은 과학혁명 이후 도래한 현대정신으로 무장한 교회 밖의 자연인들에게는 독단적 도그마에 불과하며 신학은 일반학문으로서의 토대 위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라는 실재의 신비성은 신앙의 영역이지만, 신학 작업이란 철저한 피조물의 작업으로써 하나님의 실재가 아닌 하나님 ‘개념’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일관된 견해다.
이는 근본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한 한국교회의 보수적인 시각으로는 다소 불경스럽게 느껴지거나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이를 우려한 카우프만은 1장에서 “존재의 질서” 와 “앎의 질서” 사이의 구별을 통해 신학-하기의 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존재의 질서”, 하나님의 실재에 관한 문제는 계시적이며 신앙의 영역이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절대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수행할 수 있는 질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앎의 질서는 심리학적, 인식론적으로 밝혀져야 하며, 이것은 존재의 질서에 상응하지 않으므로 두 질서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하기에 포함되는 모든 질서들은 상당 부분 우리의 인지능력에 의존하는 것이며, 많은 신학자가 신학의 출발점이 계시가 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그들이 앎의 질서와 존재적 질서를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신학-하기에 사용되는 종교적 혹은 신학적 용어를 포함한 성서의 언어들은 교회와 성서가 속한 사회와 문화의 일상언어이므로, 일상적 언어와 그 용법과 더불어 신학은 출발해야 하지,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됨’ 으로써 권위를 획득하여 전문성을 갖고 시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덧붙여 특별하고 전문적인 의미들은 일상언어에 기생하며 결코 일상언어와 동떨어져 이해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신학은 개인적이거나 교파적인 토대들이 아닌, 공적인 토대를 갖고 있으며 신학은 특별한 공동체의 언어, 혹은 그 전통들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하나님 개념은 모든 다른 개념들을 추론해낼 수 있는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으로서 어떤 면에서는 모든 다른 개념들에 의존된 것이고 조건 지워지는 것이다. (중략) 아무리 하나님 개념(혹은 이미지)이 신학적 작업의 핵심이고 근본이라 할지라도, 다른 신학적 어휘들과는 별도로 독립적으로 다루어질 수는 없다. 하나님 개념은 바로 다른 용어들과의 연관 관계를 통하여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경험 전체와의 연관성을 통하여 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카우프만은 세계라는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 하나님 개념에 대한 성찰보다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고 본다. 따라서 구성작업으로써의 신학은 첫째로 피조물 개인들의 무수한 경험과 지각들을 통일시킬 수 있는 질서로서의 ‘세계’를 파악하는 단계부터 시작한다. 그 후에 그 ‘세계’ 개념을 상대화시키는 ‘개념으로서의 하나님’(누차 강조하지만, 실존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으로, 그렇게 파악된 ‘하나님 개념’은 다시 세계, 즉 세계와 삶에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해줄 수 있는지의 실용성 여부를 그 비판기준으로 삼게 된다.
<신학방법론은> 이 세 단계로 이루어진 ‘구성신학’의 신학적 원칙들이 논의되는 매우 변증적인 과정을 담고 있으며, 철저히 인간적인, 인간으로부터 시작하는 신학-하기의 방법을 인식론적 성찰을 통해 다루고 있다. 이는 언뜻 인본주의적으로 비치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정한 신학이기도 하다.
계시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은 문화·역사의 상대주의, 종교다원주의적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음을 지적하며,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신학적 해석의 결핍으로 현대세속주의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과거의 신학은 사장 위기에 처했으며, 현대의 신학은 이러한 다원성 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새로운 신학은 현대의 모든 개별적 삶의 요소를 아우르고, 인류의 미래 향방을 제시하는 실천적 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담론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