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체실 비치에서>를 보았다.
원작을 읽다가
두 남녀의 감정선을 영화에서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린,
첫날밤의 그 일도,
과연 영화 속에 잘 표현될까 궁금했다.
하지만, 영화 속 두 배우의 연기를 보면서
그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플로렌스의 숨막히는 떨림도
에드워드의 조급함도
그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도
모두 다 느낄 수 있었다.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
완전히 헤어진 두 사람.
에드워드가 플로렌스를 향해
당신은 사기꾼이야, 라고 소리지를 때
난 에드워드의 말에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충분히 플로렌스의 입장도 이해는 했지만
에드워드를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남자라도
플로렌스의 말은 자신을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오늘 결혼했는데
나 아닌, 다른 여자하고 자라니.
그런데, 결말에서 눈물 흘리는 에드워드를 보며
에드워드가 성급했다는 걸,
에드워드가 그때 체실비치에서
돌아서는 플로렌스를 붙잡을 수도 있었다는 걸.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걸.
플로렌스는 에드워드와 헤어진 후
찰스와 결혼해 아이들을 낳고,
자신이 꾸리고 싶어했던
사중주단을 꾸려 45년간 활동한다.
그리고 런던의 위그모어 홀에서 마주친 두 사람.
에드워드의 눈물..
나도 모르게 그가 눈물을 흘릴 때 같이 흘렸다.
헤어지는 순간, 돌아서는 순간
다시는 그 사람의 소식을 듣지 않았으면 했다.
잘 살고 있다는 말도, 혹은 못 살고 있다는 말도
그 어떤 소식도 듣기 싫었는데,
결국은 알게된 소식.
나는 에드워드 처럼
자신의 가게에 우연히 찾아온
플로렌스의 딸에게,
엄마에게 생일 축하한다고 전해주렴,
이라는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라디오부터 플로렌스의 연주 소식을 듣고
위그모어홀로 찾아갈 수도 없었다.
나와 미래를 말하던 사람이,
결국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현재를 함께 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는 눈물 짓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는데
에드워드는 신혼 첫날밤 헤어진
그녀의 딸에게 인사하고,
그녀의 연주를 들으러간다.
그만큼 그에게 플로렌스와의 그 날밤은 후회로 남았던 것일까.
에드워드가 플로렌스가 좀 더 용기를 낼 때까지
기다려주었다면, 두 사람은 아이들을 낳고 백년해로 하는 삶을 살았을까.
그건 의미 없는 가정일 뿐이라고.
헤어지는 모든 커플은 결국 헤어져야 했기 때문에 헤어진 거라고.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
내 눈에 흐르던 눈물도 멈췄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는 그날밤이 아니더라도,
결국은 헤어졌을지도 모른다고.
그날밤의 일로 파경을 맞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누적되어 왔다고,
원작은 물론
영화에서도 그날 밤이 있기 전,
플래시백 되는 에피소드들로
두 사람 사람 사이의 보이지 않는 간극을 보여준다.
그날, 앞으로 그 어떤 내 소식도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우연히라도 마주치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던
그때의 내 마음은 진심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에드워드처럼 상대에게 너무 날만 세우기만 해서는 안되었다고.
에드워드와 대화를 바랐던 플로렌스처럼,
모든 것이 두렵기만 했던
그때의 내 모든 감정을 털어놓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더 가졌더라면.
에드워드처럼 모진 말로 상대에게 비수를 꽂지 않았더라면.
미래를 이야기하다,
결국은 헤어지는 결말로 끝났던
그날의 모든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고,
자책하는 시간은 좀 더 줄었을 것이다.
체실비치에 남겨진 에드워드의 얼굴.
회한과 미련으로 가득한 에드워드의 얼굴은
원작과 영화과 동일하다.
원작에서는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다시 만나진 않지만
영화 속에서 에드워드는 플로렌스와 한 말을 기억하고
그녀가 공연하는 위그모어홀에서 브라보를 외친다.
그런 에드워드를 발견한 플로렌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인다.
p. 196~197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 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
소설의 이 문장을 에드워드는 그녀가 완전히 떠난 다음에서야 깨달았다.
하긴, 이 문장을 에드워드가 체실비치에서 깨달았더라면,
그가 이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되진 못했을 것이다.
시얼샤 로넌의 명성이야 익히 들었지만
내가 영화에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문장으로 생생히 느꼈던
플로렌스의 경직된 두려움을
영상으로 고스란히 표현해내는 연기력에 놀랐다.
영상미도 아름답고
음악도 좋았는데,
영화를 관람한 씨네큐브 상영관 앞에는
영화속 연주 음악 ost를 잠시 감상할 수 있도록
헤드셋을 마련해놓기도 했다.
가을, 이 계절에 잘 어울리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