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래 김연수 소설을 좋아하긴 하지만, 김연수 소설을 읽고 등장인물에게
"으이그, 인간아! 정신 차려!"라고 외치는 일은 별로 없다. 그 만큼 김연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삶의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항상 치열하게 번뇌하는 인물들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저런 말을 하며 등짝 스매싱을 날려주고 싶다. 특히, 진우가 그렇다.
p.88
"진우도 만만치 않은 사이비야. 쓰는 소설 봐. 허구한 날, 처음 만난 여자 데리고 자는 여관문학이잖아. 쟤 소설에는, 뭐가 그렇게 좋다는 것인지 직업도 없는 남자주인공 새끼하고 못 자서 안달인 여자밖에 안 나와. (중략)"
p.95
"선영이하고 나는, 너도 알다시피, 벌써 오래전에 사귀었던 사람들이야."
"그래서 옛 생각에 같이 잔 거야?"
p. 103
"씨발놈아, 왜 남의 결혼식에 와서 남의 신부한테 사랑한다고 말해!"
p.116
"그러면 좋다. 선영아 결혼은 닭하고 하고 나하고는 연애하자. 그럼 되잖아.
어때?"
"너도 소설가라고 결혼이 미친 짓인줄은 아니?"
"정신차려 진우야. 사랑이라는 건 서로 아끼고 위하는 거야. 사랑이란 한번 사랑했다는
기억만으로도 영원할 수 있는 거야. 하지만 슬프게도 너한테는 그런 기억이 없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말은 쓰면 안 돼."
찌질한 구남친의 정석을 보여주는 진우나
선영이 옛사랑인 진우하고 잤을까봐, 전전긍긍하며 진투하고 있는
선영의 남편 광수나 너무 찌질해서 소설 읽는 내내 실소가 다 나왔다.
이 소설의 배경인 2002년 배경이라면, 나도 추억할 수 있는 꺼리가 많은 시기이지만
(그 시절, 내가 아는 선영이는 너무 많았다)
20년이 지난 2022년에 새삼, 그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읽자니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새삼 틀린 그런 문장들도 눈에 들어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진우의 찌질함은 소설 끝까지 이어져 결국은 나를 폭소케 했다.
우연히 마주친 선영이 좋은 일이 있다고 하자, 한다는 말이,
"드디어 서초동 가정 법원에 볼 일이 생겼구나. 합의 이혼하는 방법이라면 내가 잘 설명해 줄 수 있는데. 가자, 내가 설명해줄게."
란다. 당연히 돌아오는 말은 "니 앞길이나 잘 살피셔."
작가의 말에 이 소설은 특별판의 개념으로 썼다고 하는데,
그동안 김연수 소설의 무게에 짓눌려 왔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가볍게 기분 전환으로 읽기에 괜찮은 책이다.
단, 등장 인물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과 한 없는 찌질함을 견딜 수 있다면.
물론 작가 특유의 현학적인 사랑에 대한 담론도 소설 중간중간에 삽입되어 있지만
이 소설은 유독 등장인물들의 찌질한 대화가 귀에 반복 재생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