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숨을 돌리려고 늦은 오후 , 가게앞 테라스로 나갔다 . 눈을 들면 낡은 건물의 벽과 오래되서 빛바랜 건물벽의 풀뿌리같은 실금이 보이곤 했는데 오늘은 퍼붓고 흩날리며 몰아치는 빗줄기에 건물들이 아주 멀리 멀리 달아나 나를 다른 공간에 서있게 해주는 것 같았다 .
여기는 서울의 한 복판에 가까운 종로의 어느 거리인데, 몇 발자국만 걸어 나가면 문구점과 완구점 , 또 열대어와 크고 작은 규모의 인쇄소들이 늘어서 있는 그런 곳이다 .
쏟아 지는 비를 보며 내가 떠올린 건 ' 혼자 있기 좋은 방 ' 에 소개된 푸른 바다를 앞에 둔 눈부신 여인의 모습이다 . ( 271 쪽 / 애벗 풀러 그레이브스 < 갑판 위에서 > , 연도미상 )
하얀 모자위로 마치 투명한 물컵에 풀어 놓은 푸른 잉크같은 리본이 휘날리고 여인은 한발은 난간의 끝에 또 한 발은 주춤 뒤 쪽에 , 몸의 무게를 바다와 싸우기라도 하듯 중심을 잡고 마주 서 있는 그 풍경 .
오늘 예고된 장마가 시작되고 나는 계속 입 안으로는 이승열의 ' 꽃이 피면' 이란 노래 중에 어느 구절을 반복해 부르며 생각한다 .
' 혼자 있기 좋은 방' 은 마치 그 노래의 한 구절처럼 먼저 울어준 누군가 때문에 드디어 나도 울 수 있게 되는 시간을 선물해 준 것이구나 하고 ...
마음은 흩날리고 걱정은 몰아쳐도 , 곧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공감한 무수한 문장들에 대해 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
비오는 건물 모퉁이에서 한 여자가 비의 무게를 , 바람의 방향을 견디며 간신히 우산을 들고 맛있게 담배 연기를 내뱉길래 그녀가 가고 그 자리에 가보니 싱싱한 까마중 잎들이 까만 눈을 조롱조롱 들어 나를 맞이한다 . 예쁘구나 . 예뻐 . 그녀도 이것들과 오래 눈길을 주고 받은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