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은 다 한 번씩 거치는 인류애 상실의 대표과제가 있다.
바로 조.별.과.제!
세상에 얼마나 많은 유형의 사람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는 과제에서 조장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한 분만 카카오톡을 쓰지 않으셨는데(스마트폰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조과제 변경시간을 카톡으로 공지해놓고 그 분께 문자 보내는 걸 까먹었다. 모임 당일에 아차! 싶어서 후다닥 문자를 보내면서 깨달았다. 앞으로 일정 잡거나 사진 올리는 등의 모든 일은 다 카톡으로 이루어지게 될 거고, 스마트폰의 세상이 오겠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것이 신의 뜻이듯, 우연이든, 책에서 말하는 인간의 욕망이 합의되는 지점이어서든. 그 변화의 한복판에 살고 있음에도 체감하지 못하고 흘려보낸 적이 많다. 페이스북이 처음 등장했을 때도, 외국에서 온 친구와 소통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사고 카카오톡을 깔았을 때도, 많은 자료를 찾기 위해 구글에 들어갔을 때도 분명 나는 있었다. 유심히 살펴보고 생각하지 않았을 뿐.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운명론이거나 정해진 결과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모둠살이가 숙명인 인간종의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원하는 지점, 각자의 욕망이 합의되는 지점, 바로 그곳에서 일어날 일은 일어납니다. 각자의 욕망이 부딪히고 서로 만나 추동하며 생성되는 더 큰 욕망의 용광로가 곧 우리의 미래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고, 겪어 나가게 될 미래를 이 책은 다 엿봤다는 듯 알려주고 있다.
AI는 중간을 학습한다
온갖 국룰이 생겨난 이유는 타인으로부터 내 평판과 효율을 극대화하고 싶어서입니다. 평범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러나 이 기준이 너무 높습니다.(...) 무엇보다 평균, 중간을 추구한다는 국룰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서글프게도 중간의 인간은 대체됩니다. AI는 중간을 학습해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지금 중간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책은 말하고 있다. AI가 중간을 학습한다면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오래전부터 상담사를 꿈꿔왔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스무살에 심리학을 공부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10년이 지났다. 상담은 상담실에서 나이 지긋하고 인자해보이는 사람에게 받는 거라는 정의는 일찍 깨졌다. 카페처럼 음료를 마시며,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상담 카페가 생겼고, 온라인/전화 상담이 생겼고, 내 전공인 미술치료를 화상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도 생겼다. 몇 년 뒤에는 AI가 사람을 상담하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 때 나의 차별화된 지점은 무엇인가? AI가 따라할 수 없는 오리지널리티에 대해 생각해봤다.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과 분위기는 AI가 더 잘 구현할 수 있다. 차별화 지점은 나만이 가진 마음이다. 타인을 위한 마음. 내담자는 상담실이 크고 예쁘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앉아있는 상담사가 나와 맞는가/ 아닌가에 따라 비싼 비용을 기꺼이 지불하고 1주에 한번씩 자신의 마음을 풀어놓는다.
사람과 사람의 대화에서 생기는 눈빛, 목소리의 톤, 손짓. AI가 따라할 수 있어도 인간 대 인간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비언어적 수단은 그 사람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AI가 중간값을 학습해서 인간의 비언어적 정보를 수집하고 이에 맞는 대답을 내놓는다고 해도 사람은 그 짧은 찰나에 공허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한다. 기계에게는 사람만이 갖는 타인을 위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당신을 믿으며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느낄 수 있어야 내담자는 상담시간에 미완성된 자신을 완성해 나간다. 스스로의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당사자 뿐이고 상담은 AI처럼 문제의 대답을 들려주거나 대신 해결해주는 일이 아니므로.
상담사는 안전한 환경 안에서 내담자가 자신을 찾아갈 수 있도록 지지하며 들어줄 뿐이다. 내가 할 일은 들어줌에 있어서 나의 편견과 생각이 방해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돌아보고 공부와 수련이라는 현행화를 지속하는 일이다. 다른 인간은 있어도 틀린 인간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담자의 평온을 위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