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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기장에서 나눈 문답입니다.

목연샘!

그대는 11월 22일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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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의  오늘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한 날입니다.

일제 압박하에 있언 대한민국의 독립에 대해서

국제적으로 힘이 있는 강대국들이 처음으로 거론한 날이지요.

 

학창시절에 카이로회담 한국 독립 거론

포츠담 회담 한국 독립 확인 등을

열심히 외우던 기억이 새롭네요.

 

◀1337  고려 충신 정몽주( ~ 1392) 태어나다. 고려 말기 문신 겸 학자인 그는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주자가례》를 따라 개성에 5부 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했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단심가〉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말에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1562  조선 문신 소세양(蘇世讓) 별세하다(1486∼). 단종 생모(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 현릉(顯陵)으로 이장케 하였다.

 

◁1869  프랑스 소설가 A.지드 ( ∼1951.2.19) 태어나다. 문학의 여러 가능성을 실험한 프랑스 소설가인 그는 《신프랑스 평론》지(誌) 주간의 한 사람으로서 프랑스 문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어 20세기 문학의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사전꾼들》을 발표를 통해 현대소설에 자극을 줬다. 주요 저서에는 《좁은 문》등이 있으며 194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1890  프랑스 군인․정치가 드골(1890.11.22∼1970.11.9) 태어나다. 그는 미․소에 대항하여 프랑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 시켰으며, 대통령에 올라 ‘위대한 프랑스’의 재현과 ‘대서양에서 우랄까지’의 대유럽의 구상에 골몰했던 그는 1969년 선거에서 패배,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 80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1․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그가 남긴 2차대전에 관한 「회고록」이 유명하기도 하다.

 

◀1916  홍난파가 통속창가집을 간행하다.

 

◁1943  독일 마그데브르크에서 열차 충돌로 79명이 사망하다.

 

◁1943  3국 정상들의 카이로 회담이 열리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카이로에서 만나서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한국의 독립을 처음으로 결의했다.

 

◁1943  레바논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다.

 

◁1950  뉴욕의 리치몬드힐에서 열차 충돌로 79명이 사망하다.

 

◁1955  중앙조약기구(CENTO)가 결성되다.

 

◁1955  서독군이 창설되다.

 

◁1956  제16회 멜버른 올림픽이 개막되다.

 

◁1957  모스코바 12개국 공산당회의에서 ‘세계평화선언’을 발표하다.

 

◁1963  인도-중국의 국경 분쟁의 휴전을 발표하다.

 

◁1963  미국 제35대 대통령 J.F.케네디 암살당하다(1917.5.29∼).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 주십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1946년 매사추세츠주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1952년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53년 <타임 헤럴드>지의 사진기자 재클린 부피에와 결혼하였다. 1960년에는 대통령선거 민주당 후보로 출마, 뉴 프런티어(New Frontier)의 슬로건으로 미국 국민에게 호소하여 공화당 후보 R.M.닉슨을 누르고 승리하여 1961년 미국 역사상 최연소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자로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 당시 케네디와 닉슨 간의 텔레비전 토론은 선거운동에 새로운 장을 열어놓았다. 국내의 흑인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으며, 특히 외교면에서 쿠바미사일 위기에 핵전쟁의 위험을 무릅쓰고 소련의 N.S.흐루시초프와 대결한 결과, 미국이 쿠바를 침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대신에 소련은 미사일․폭격기 등을 쿠바에서 철수하고, 미국측의 사찰을 인정함으로써 소련과의 극적인 타협을 이루었다. 이를 계기로 소련과 부분적인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하였고, 미․소간의 해빙무드를 형성하였다. 또한 중남미 여러 나라와 ‘진보를 위한 동맹’을 결성하였고, 평화봉사단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개입에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중국 본토와의 재수교를 재선 후의 최대 과제로 삼았으나, 1963년 11월 22일 유세지인 텍사스주 댈러스시에서 자동차 퍼레이드 중 암살자의 흉탄에 치명상을 입고 별세하였다. 학위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나」(1940)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하였으며, 1957년 「용기 있는 사람들」로 퓰리처상을 받기도 하였다.

 

◀1963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고국으로 돌아오다. 고종의 셋째 아들이며, 순종의 이복동생인 이은은 1900년(고종 37년 : 광무 4년) 8월에 영왕(英王)[영친왕]으로 책봉되었다가 1907년(순종 1년 : 융희 1년) 8월 7일에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하여 11세의 나이로 1907년 12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식 교육을 철저히 받게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융희황제(隆熙皇帝 : 순종)가 폐위되자 황태자가 아닌 왕세제(王世弟)으로 불리었다. 일본 황실의 내선일체정책에 따라 1916년 8월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학생이던 영친왕은 일본 황족인 나시모 토노미야(梨本宮)의 딸 마사코(方子)와 강요된 정략적인 약혼을 하였으며, 1920년 4월 4일 결혼하여 비(妃)로 삼았다. 그리고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형식적으로 왕위계승자가 되어 이왕(李王)이라 불리었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중장에 이르렀던 영친왕은 1945년 8․15광복을 맞아 귀국하려고 했으나 한․일국교단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왕족에서 제외되어 거처와 재산을 몰수당하는 등 고난의 세월을 보내다가 1963년 의식불명이 된 병석의 몸으로 56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뇌혈전증으로 계속 병상생활을 하면서 부인 이방자와 함께 사회사업에 뜻을 두고 1966년 심신장애자재활원인 자행회(慈行會), 1967년 신체장애자훈련원인 명휘원(明暉園)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오랜 병고 끝에 1970년 5월 1일 7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1963  영국작가 헉슬리가 별세하다. 그는 크롬 옐로(1921), 도화춤(1923), 연애대위법(1928), 멋진 신세계(1932), 가자에 눈멀어서(1936), 목적과 수단(1937), 몇 해 여름을 지나서(1939), 시간은 멈추어야 한다(1944), 원숭이와 본질(1946), 영원한 철학(1945), 지각의 문(1954), 멋진 신세계(1962), 섬(1962)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66  경복궁에 종합박물관을 신축 기공하다.

 

◀1967  독립운동가 신숙(1885~ ) 별세하다. 그는 1920년 상하이로 가서 천도교를 전파했으며, 1923년 국민대표회의 소집에 참여했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북만주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했고 홍진 · 지청천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하고 총무위원장 ·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1971  인도-파키스탄의 무력분쟁이 전면전쟁화로 확산하다.

 

◀1972  남북적십자사 4차 본회담이 서울에서 열리다.(22~24일)

 

◀1974  포드 미국대통령이 내한하다.

 

◁1975  카를로스 스페인 국왕이 즉위하다.

 

◁1977  초음속 콩코드 기가 파리-뉴욕을 처음으로 운행하다.

 

◀1981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위원장 이재문이 옥중에서 별세하다.

 

◀1981  부산 금정산에서 버스가 추락하여 33명이 사망하고, 37명이 부상을 당하다.

 

◁1981  소련 사하로프 박사가 유배지 고리키 시에서 단식을 시작하다. (18일간 지속)

 

◀1983  버마 아웅산 묘소 테러범에 대한 첫 공판이 버마에서 열리다.

 

◀1989  한국과 항가리가 항공협정을 체결하다.

 

◁1989  르네 무하마드 레바논 대통령이 취임 17일 만에 폭탄 테러로 피살되다.

 

◁1990  대처 영국 총리가 사임하다.

 

◀1999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로 거론되는 선동열 선수가 은퇴하다. 그가 국내 프로야구에 남긴 기록인 146승(최다)40패, 132세이브, 승률 0.785, 통산 방어율 1.20, 탈삼진 1698개(최다)은 현역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는 물론 앞으로 프로무대에 뛰어들 어떤 선수도 좀체 이루기 어려울 대기록으로 평가받고 있다. 97년에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한 그는 97년 1승38세이브, 98년 3승29세이브, 99년 1승28세이브 등 3년 연속 30세이브 포인트를 돌파하면서 4년간 단 4차례만 패전기록을 남겨 '나고야의 수호신'이라는 새로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1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다.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야당의 국회 출입을 봉쇄한 뒤 날치기를 통과시킨 것이다. 날치기 의회의 사회자는 박희태 의장의 위임을 받은 부의장 정의화이다. 날치기 의회의 참가자는 170명이고, 151명이 찬성하고, 반대 7명, 기권 1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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