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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

이이화 저
한길사 | 2015년 08월

 

2) 책 읽은 뒤 느낌

  [ 1권 제2부 : 우리 민족의 뿌리 ]

  제2부는 우리 나라의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 해당하는 설명이다.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 사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우리 나라에 '구석기 문화'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 까닭은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몽골, 중국, 일본에서는 출토되었는데 우리 나라에만 '없다'면서 말이다. 훗날 '일본의 구석기 유적과 유물' 가운데 상당수가 '조작'되었다는 대형사건이 터졌는데도 이를 은폐하고 애써 감추려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더욱 괘씸하다. 허나 1930년대 이후에 우리 나라에서도 '구석기 유적(평양 상원 검은모루 동굴)'과 '구석기 유물(경기 연천군 / 공주 석장리)'이 쏟아지자 그런 말이 쏙 들어가고 말았다. 식민사학자들의 억지 주장과 왜곡 따위가 하나하나 밝혀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보면 우리 나라에서 '구석기 시대'는 약 70만 년 전에 시작되었고 세계적으로도 약 100만 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인류의 시작'을 '아프리카 기원설'로 보고 있으므로 이런 해석은 전혀 무리가 없다. 한때 '독자기원설'을 주장하던 인류학자들도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한 관계로 답보 상태이다. 참고로 오늘날의 '인류고고학'은 'DNA 유전자 분석의 결과'로 인해 비교적 정확한 '연대분석'을 통해 진행되어 왔기에 현재는 '아프리카 기원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이이화도 '아프리카 기원설'을 토대로 이 책을 저술하였다.

 

  구석기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교과서에는 무리사회를 이루고 떠돌이 생활을 하였으며 사냥과 채집, 낚시 따위로 먹거리를 해결하였고, 동굴이나 막집에서 살았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시대는 굉장히 오랜 세월이었기 때문에 더욱 다양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즉, 넓은 초원이나 평원지대에 살던 다른 지역의 구석기인들은 그렇게 살았을지 몰라도 우리 나라에서 살던 구석기인들은 그렇게 많이 떠돌아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구석기인들이 살던 시기의 '한반도의 기후'는 빙하기와 간빙기가 여러 차례 반복되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먹거리를 따라 남으로 북으로 떠돌아 다니다가 오늘날의 해안을 형성하였던 마지막 '간빙기' 시절(약 4만 년 전) 즈음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가 간혹 잊고 지내는 상식 중에 하나가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은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던 시절이 '구석기 시대'였다는 점이다.

 

  우리 나라의 신석기 문화는 서기 6000년 전부터 서기 1000년 전까지의 약 5천년 동안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계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는 약 1만 년 전에 신석기 문화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 또한 세계사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는 해석인 셈이다. 물론 '역사'에서 시기의 전후가 그닥 중요하지는 않으나 일부 몰지각한 전문가(?)들이 이를 두고 '민족의 우월'을 따지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국가도 형성되지 않았고 겨우 '씨족 사회'를 이루고 있었을 뿐인데, 민족의 우월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따름이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원시부계사회'에 맞먹는 '모계사회'가 이루어졌는가 하는 점이다. 한자의 '성(姓)'은 '여자가 낳았다'는 뜻글자다. 우리는 '족보'를 중시하는 사회에 익숙하다보니 '아버지의 성씨'를 자식에게 자연스레 물려주고 있지만, '여자가 낳았다'는 뜻으로 해석을 한다면 '어머니의 성씨'를 물려준 적이 있었다는 짐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세계적으로도 '모가장(母家長) 사회'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일부이긴 하지만 지금도 살고 있는 '원시부족들' 가운데 '모계사회'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근거로 본다면 신석기 시대에 '모계사회'를 이루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허나 이이화는 "있었을지는 몰라도 얼마 가지 않아 '부계사회'로 자연스레 전황되었을 것이다"라고 해석하였다.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특히 '씨족사회'에서는 남녀 간의 '피지컬(육체적)의 차이'를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더구나 여자의 질투보다 더 큰 '남자의 질투와 소유욕' 때문에라도 '난잡한 혼음'보다 '일부일처제'를 당연시 했을 거라고 해석하였다. 오늘날에도 '원시부족사회'에서 '혼음'이 있었다는 견해는 뒷받침할 근거가 부족해 퇴출 당하였다. 지금도 아프리카나 남미의 '원시부족'에서도 '혼음'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난잡한 성교'를 즐겼던 건 역사상으로도 '근대 유럽인들' 뿐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한편, 신석기 유물에는 '간석기'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물'이 전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뼈로 만든 '골각기'와 흙으로 빗은 '토기'다. 골각기 가운데 '뼈바늘'은 신석기인들이 옷을 지어 입거나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고 다양한 장신구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이니 아주 중요한 유물이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토기'는 '빗살무늬토기', '민무늬토기', '덧무늬토기' 등 쓰임새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하였으며 '농사'를 지어 곡식을 저장하고 음식을 조리하는데 쓰였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중요한 유물이다. 신석기혁명이라고 불리는 '농사'를 우리 나라에서도 일찌감치 시작하였다는 증거니 말이다. 이때 농사 짓던 대표적인 곡식은 조, 수수, 기장, 콩, 밀 등이다. 그리고 느즈막히 '무논(水田)'에서 '벼농사'를 지었던 흔적도 발견되고 있어서 벼와 보리도 우리의 주식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이화는 현재에도 '쌀'을 주식으로 하는 국가 가운데 한국이 가장 많은 '쌀 소비'를 하고 있다고 뒷받침하고 있는데,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우리 나라도 '쌀 소비량'이 현저히 감소한 것을 보면 뭐라 덧붙이실지 자못 궁금하다.

 

  이밖에도 우리 나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신석기인들의 흔적'인 '무늬'와 '암각화'에 대한 설명이 인상적이다. 이이화는 이를 두고 '시청각 교재'라고 해석하고 있다. 각종 무늬는 '오늘날의 문자'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암각화에 그려진 각종 동물들은 '디스커버리'나 '네셔날 지오그래피'에 해당한다고 비유한 것이다. 물론 '주술적인 용도'도 빼놓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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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책찾사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의 역사는 아득히 먼 시기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언급해주신 것처럼 구석기 시대마저도 역사적인 왜곡과 주장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또 이 시기가 민족의 원류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기의 역사에 대해서도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시기에는 모계사회였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오늘날 남녀평등에 대한 부분 역시 역사를 통하여 그 흐름을 짚어볼 수 있으니까요.

    2020.03.23 14:12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이이화가 이 책을 집필할 당시(90년대)만해도 '식민사학'이 판을 치고 있던 시절이었죠. 강단사학자들은 전부 '식민사학자'들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던 시절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병도의 후학들'이 장악한 대학강단에서 벗어나 '재야사학자'의 위상을 꿋꿋이 지킨 선생님을 열렬히 응원하였었답니다.

      2020.03.24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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