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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이 책을 다 읽었다는 안도감에 스스로에게 대견함을 느껴 듬뿍 격려를 해주었다. 장장 700여쪽인데도, 한 쪽당 빽빽히 30행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29행간까지 치밀한 문장은 읽는 이로 하여금 지치게 혹은 뿌듯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는 마치 철인3종경기를 완주해낸듯한 착각에 빠져들게도 만들었다. 더구나 이것을 20시간만에 주파했을 때에 내 심장은 의자에 앉아 있음에도 100미터를 숨도 안쉬고 달린 듯 헐떡거렸다. 한마디로 책에서 손을 때지 못하게 하는 뭔가가 있는 책이었다.
 
 이 책 속에는 큰 반전이 있다. 두 개의 반전이 있는데 그 중에 첫 반전의 충격이 장난이 아니다. 총 3부로 나뉘어 <수전의 이야기>, <모드의 이야기>, <다시 수전의 이야기>로 진행되는데. 각각의 이야기가 넘어가는 부분에 반전을 마련해두었다. 1부에선 속고, 속이며, 마침내 독자마저 속이는 반전이라면, 2부에선 1부의 반전을 뒤집는 또 하나의 반전을 안배해두었다. 3부에선 이 반전들을 마무리하였다.
 
 이 책을 출판사에선 <빅토리아 시대의 레즈비언 이야기>라고 포장하여 시장에 내놓았는데, 자칫 포르노르라피로 오해하시고 읽으실 독자들에겐 실망을 금치 못할 지도 모른다. 물론 이 책 속에 지저분할 정도로 농염한 성묘사가 담겨 있다. 또 이 책의 작가인 <새라 워터스>는 다른 작품에서 '딜도'라는 단어도 서슴치 않고 썼다고 한다. '딜도'가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모르는 독자의 순결을 위해 굳이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여하튼 새라 워터스의 섹슈얼 리얼리즘은 이 책에서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남성의 성적쾌감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여성의 오르가즘처럼 절정에 다다른 격렬함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긴 여운으로 묘사되었다. 이런 점에선 남성독자가 이 책을 읽을 경우 대부분 중반에 읽다읽다 지치지 않을까 싶다.(난 남자다)
 
 또 남성독자들이 싫어할만한 점을 꼽으라면 배신과 복수가 난무한 작품인데도 누구하나 그럴싸한 파멸된 인물이 없다는 점, 죽을 만한 인물들이 죽는데도 술에 술탄 듯 맹탕하게 죽어버린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화끈한 활극장면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이 책의 감동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단지 남성독자가 읽기엔 감동따로, 여운따로 느껴지는 밋밋함을 맛 볼 것이다. 이런 점은 여성독자들에겐 정반대로 제대로 눈물샘을 자극하겠지만.
 
 여하튼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책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책 겉표지에 인상깊게 장식된 노장 장갑의 주인이 누구인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새삼 느끼게 되었다. 노란 장갑 어딘가에 수놓여져 있을 이니셜과 사무치게 물어뜯었을 잇자국을 찾으며 이 책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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