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초월해서 읽히는 책은 과거 어느 특정한 시대를 배경으로 썼지만, 오늘날에 비춰보아도 그대로 녹아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아Q정전>도 그런 책 중에 하나이다. 이 책에서 아Q를 보고, "뭐, 이딴 놈이 다 있어."라고 생각하셨다면 작가가 의도한대로 제대로 읽은 셈이다. 루쉰은 20세기 초반 서구열강의 중국 침탈에도 저항다운 저항도 못해본 채 열강에게 이권을 빼앗기고 마는 조국과 국민들의 안이함을 고발하고자 <아Q정전>을 썼다.
그럼 오늘날에는 무엇 때문에 100여년 전에 쓰여진 이 책이 읽히는 것인가?
그건 오늘날에도 '아Q'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자 앞에선 비굴하게 행동하면서, 약자에겐 가혹하리만큼 강자행세를 하는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서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또 주는 것 없이 괜시리 밉고,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뭐든지 미운 사람도 있다. 일만 했다하면 말썽에, 그나마 제대로 한 것도 없으면서 언제나 희희락락하다. 예를 들면, 동네 건달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서도 아Q는 "애들이 한 짓이야, 세상 말세라니까. 허허."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면서도, 동네 건달들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힘없는 어린 비구니에게 욕지기를 하며 화풀이 한다. 치졸한 인간의 전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개인적일 때야 '아Q스럽게' 행동하는 것이 문제될 것은 없다. 제 힘도, 분수도 모른채 성정만 거칠어서 힘센 자에게 대들었다가 뼈도 못추스릴 정도가 되면 '아Q'만도 못한 못난 사람이 될게다. 적어도 아Q는 자신을 지키는 '최소한의 방어본능'과 정신적 스트레스를 벗어 던질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아Q는 문제가 많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중적 가치관을 가진 기회주의자 혹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마치 <태평천하>에 나오는 윤직원처럼, <꺼삐딴 리>에 나오는 의사양반처럼 약삭빠른 인간이 사회에 많을수록 그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루쉰은, 즉 쑨원은 자신의 조국이 피폐해져 가는 아쉬움과 국민들이 대다수 '아Q스러워' 지는 것에 안타까워했다. 제발 깨어나자, 구(舊)사회의 폐습과 인습에 절어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인데도 대국주의(大國主義)에 빠져 나태해진 국민들에게 일침을 놓기 위해 이 책을 썼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쑨원의 진의(眞義)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약싹빠르게 살 것인가? 아니면 무지에서 깨어나 한 번 인간답게 살아볼 것인가? 쑨원은 아Q가 마지막 총살을 당하면서 "살려줘."라고 말한 것은 <마지막 희망>을 말한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대에 몰지각하게 살다 허무하게 죽게 될지언정 마지막 순간에라도 제 잘못을 깨달았다면 미래는 어떻게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쑨원은 미래를 점쳐 보았을 것이다. 비록 신해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제2, 제3의 혁명이 일어나 바르게 우뚝 선 중국의 모습을 예감했을 것이다. 비단 중국뿐만 아닐 것이다. 우리도 가능하다. 그것이 이 책을 읽는 수많은 목적 중 하나 일 것이다.